명량해전 *..역........사..*



영화 명량은 보지 않았으므로 이 글은 영화 명량에 대한 것과는 무관합니다.

이건 다만 이순신이 명량에서 일자진을 펼쳤다고 흔히 말하는데, 그 근거가 뭔지 궁금해서 찾아보다가 명량해전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잘못 알려진 사실이 많아 보여서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명량해전 일자진의 근거는 못 찾았네요. 아시는 분은 댓글로 알려주세요.

>근거를 연성재거사님이 알려주셨네요. 이민서의 "명량대첩비"에 나오는 '뱃머리를 나란히 하고'라는 구절에 의거한답니다.







1. 명량해전 전사前史
1597년 7월 16일 칠천량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당한 후 조선 조정은 8월 3일 이순신을 다시 삼군통제사로 임명했습니다. 이순신은 급히 휘하 장병들을 소집했습니다.

조정은 일단 이순신을 임명했으나 수군은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수군 해체의 조서를 보내는데, 이순신은 이에 대해 8월 15일 그 유명한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라는 장계를 올립니다.

8월 19일 배설로부터 12척을 인수받은 뒤, 이순신은 몸이 아파 드러눕습니다.

8월 24일 건강을 회복한 이순신은 어란포에 진영을 꾸립니다. 어란포는 어디냐 하면...

위 지도의 가장 하단부에 빨갛게 표시된 부분입니다. 육지 부분은 해남군이고 오른쪽의 섬은 진도입니다. 상단에 빨간 동그라미 부분이 명량해협(울돌목)이고, 그 위의 작은 빨간 네모 부분이 전라우수영 자리입니다. 이 지도는 잘 보아두세요. 앞으로 계속 언급합니다.

사실 이순신은 계속 서쪽으로 후퇴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이 앞에도 강진 쪽에 자리를 잡고 있다가 두 번이나 서쪽으로 물러나 어란포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만큼 일본 수군의 압박이 심해지고 있었던 거죠.

8월 26일에 앞서 포진했던 곳에 일본군이 도달했다는 첩보를 받습니다. 그리고 이틀 후인 28일 8척의 일본 군선이 어란포에 등장합니다.

이순신은 이들을 물리치고 함대를 8월 29일 다시 북쪽으로 이동시킵니다. 위 지도에서 명량 우측에 보면 작은 섬이 하나 보이는데 사슴섬이라고 합니다. 그 근처로 이동한 것입니다. 명량 앞쪽에 진을 친 거죠. 그랬다가 다음날 그 아래쪽 벽파항이라 보이는 벽파진으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이날(30일) 배설은 아프다고 상륙한 뒤에 9월 2일에 달아나버립니다.

이순신이 이때까지 확보한 전선은 총 13척. 그리고 정탐용으로 쓰는 초탐선 32척이 전력의 전부였습니다.

9월 7일 오후 일본 군선 12척이 벽파진에 출몰합니다. 이순신은 이들을 몰아내고 그날 밤 야습이 있을 것을 예견하여 대비하였다가 무찌릅니다.

9월 9일은 중양절이라 소 다섯 마리를 잡아서 장병들에게 먹입니다.

9월 14일 일본 함대 55척이 어란포에 도착합니다.
9월 15일 이순신은 함대를 전라우수영으로 이동시킵니다.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이순신은 명량 앞쪽에서 싸우는 것은 승산이 없다고 보고 명량 뒷편으로 이동한 것이죠. 전라우수영의 위치를 위 지도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 시점에서 육지 상황을 알아봅시다.

일본 육군은 8월 7일 전남 구례를 함락시키고 8월 12일에서 15일까지 총력전을 펼쳐 남원성을 함락시킵니다. 조명연합군이 패퇴하고 말죠. 이 전투에는 일본 수군들이 함께 참전하고 있습니다. 일본 수군이 전라도 쪽 해안 공략에 나서지 않았던 것은 조선으로서는 천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그나마 남은 수군 전력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8월 19일 전주에 무혈입성한 뒤 우군 6만여 명은 북진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명군이 내려와 직산에서 양군이 충돌합니다. 그것이 명량해전 직전인 9월 7일. 이 전투와 그 이후 상황에 대한 해석은 구구한데, 그 점은 말미에 다시 거론하도록 하죠.

2. 명량해전은 명량에서 안 벌어졌다?

의외의 이야기지만 명량해전이라 불리는 이 해전은 명량해협에서 벌어진 것이 아닙니다. 난중일기의 해당 대목을 한 번 보겠습니다. 1차 사료이자 해전의 지휘관이 남긴 기록입니다.

16일 갑진. 맑음. 이른 아침에 별망군이 와서 보고하기를, "적선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명량을 거쳐 곧장 진지로 향해 온다."고 했다. - 교감완역 난중일기, 노승석 역, 민음사, 2010, 417쪽

원문은 "鳴梁由入直向結陳處"라고 되어 있습니다(충무공전서에는 結陳處가 我船으로 나옵니다). 적선은 명량을 통과한 것입니다!

이때 일본 전함의 수는 3백여 척이었으나 명량해협의 특성상 대형군선인 아다케는 통과하지 못하고 중소형 군선 세키부네 133척만이 해협을 통과해 우수영 앞바다로 쳐들어왔던 것입니다. (이민웅, 임진왜란 해전사, 청어람미디어, 2004, 226쪽)

명량해협은 오전 7시에 정조기(조류가 멈추는 때)를 맞이하므로 일본군은 이때 이곳을 통과했을 것입니다.

이순신은 첩보를 받은 즉시 출동을 명했고 우수영 앞바다로 나갔습니다. 일본군은 조선 함대를 기다리고 있다가 이들은 즉각 둘러싸게 됩니다. 난중일기를 보죠.

곧바로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백삼십여 척이 우리 배들을 에워쌌다. 여러 장수들은 스스로 적은 군사로 많은 적과 싸우는 형세임을 알고 회피할 꾀만 내고 있었다.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이미 두 마장 밖에 있었다.



>이 전투가 벌어진 곳이 우수영 앞바다라는 것은 소수설인 모양이군요. 여기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역시 난중일기에 나오는 대목으로 이것입니다.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이미 두 마장 밖에 있었다."

마장은 부정확한 거리 단위인데, 5리에서 10리 사이를 가리키는 것이니 두 마장이면 최소 4킬로미터 이상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런데 우수영에서부터 명량입구까지가 1.7킬로미터 밖에 되지 않습니다. 옆으로는 "양도"라는 섬이 있어서 바다가 보이지 않죠. 그러나 명량이 전장이 되면 거기서는 4킬로미터의 시야가 후방에 확보됩니다.

해전 위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지점이 이야기됩니다. 해당 지도는 "정완희·민승식, 칠천량해전과 명량해전의 유형 전투력 분석, 군사 91호, 2014.6 277쪽" - 알려주신 천하귀남님께 감사드립니다 - 에서 가져왔습니다. 관심이 있는 분은 아래 댓글에서 해당 링크를 통해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우수영 앞에서 부딪쳤거나 명량 앞에서 부딪쳤거나 후방으로 일본 함선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에워쌌다(回擁)는 것은 전면부와 좌우가 막혔다는 이야기겠죠. (명량해협이라면 어찌 되었건 에워쌌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정도의 공간도 나오지 않을 것이고요.) 마치 학익진 안에 들어간 것처럼 되었을 겁니다.

적선이 이미 포위망을 구성하고 있는 상황. 등 뒤를 보이면 몰살밖에 없었을 겁니다. 이순신은 여기서 기함을 몰아 전진합니다. 난중일기를 또 보죠.

나는 노를 급히 저어 앞으로 돌진하며 지자, 현자 등의 각종 총통을 마구 쏘아대니, 탄환이 나가는 것이 바람과 우레처럼 맹렬하였다. 군관들은 배 위에 빽빽이 들어서서 화살을 빗발치듯 어지러이 쏘아대니, 적의 무리가 저항하지 못하고 나왔다 물러갔다 했다.

이순신은 적들의 기선을 제압하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133:1, 무시무시한 상황입니다. 모든 장병들이 겁에 질려 있는 상황. 이순신은 호통을 치는 대신 그들에게 부드럽게 말합니다.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하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 흔들리지 말고 더욱 심력을 다해서 적을 쏘아라."

더 큰 문제는 아군이 움직이지 않는다는데 있었습니다. 아군의 함선들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군령을 들을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겁니다. 군령이 들릴 곳까지 배를 움직였다가는 이순신이 후퇴하는 것으로 알고 적들이 기세를 올려 추격해 올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적의 기세를 올려주었다가는 전멸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순신은 호각을 불게 하고 초요기를 세우고 전진을 명하는 깃발을 올립니다. 초요기는 장수를 소집하는 깃발입니다. 이에 중군장 김응함과 거제 현령 안위가 배를 몰고 옵니다. 이순신은 배 위에서 안위와 김응함을 직접 꾸짖고 독전합니다.

안위와 김응함이 전진하자 일본 함선이 달려들었습니다. 한 함선과 싸우고 있던 안위의 배에 일본 함선 두 척이 붙더니 왜병들이 안위의 판옥선으로 기어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이에 안위는 몽둥이, 창, 돌멩이들로 기어오르는 왜병을 공격했습니다.

안위와 병사들이 기진맥진해질 때까지 이 공방이 이어졌습니다. 이순신은 안위를 공격하는 세 척의 배를 공격하여 침몰시킵니다. 이무렵 다른 함선들도 이순신에게 합류하여 일본 함선들과 맞섭니다.

이렇게 해서 일본 함석 31척이 격파되는 가운데 마다시라고 나오는 왜장 구루시마 미치후사의 시체가 발견되고 이순신은 그를 효수하여 내걺으로써 일본군의 사기를 죽입니다.

일본군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서 물러나고 마는데, 이것이 대략 오후 2시 경으로 추정됩니다. 이렇게 명량해전이 막을 내립니다.

3. 조선군은 13척 뿐이었나?

이 전투에는 이순신의 함선 13척(사실상 김억추는 참전하지 않았으니 실제로 싸운 함선은 12척이겠죠.) 외에 민간 어선들도 참여합니다. 다른 부분은 잘 모르겠지만 이 전투에서 죽은 인물 중 마하수馬河秀의 경우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래 무관이었으나 이순신이 투옥 된 뒤 물러났지만 이순신이 통제사로 복귀하자 달려온 인물입니다. 관직은 없는 상태에서 향선 십여 척을 이끌고 명량해전에 참전합니다. 기록으로 보면 그는 이순신이 위기에 처하자,

"사나이로 태어나서 이때가 죽을 때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마하수 [馬河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라고 외치며 일본 함선에 달려들어 총탄에 전사하고 맙니다. 이 사건이 이순신이 단독으로 싸웠다는 때 있었는지, 격전 중에 있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단지 13척의 군선으로만 전투가 진행된 것은 아니라는 반증이 되겠습니다.


>물론 마하수의 경우, 기록이 후대의 것이므로 나중에 명량해전에 가져다 붙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가능성을 제기한 분이 계시네요. 하지만 가문의 사적인 부분이 아니고 충무공전서에 실린 기록이므로 특별한 이유 없이 부정하기도 쉽지 않다고 봅니다.



이순신의 함선은 매우 위태로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난중일기에는 이순신과 함께 있던 순천 감목관 김탁, 종 계생이 적탄에 맞아 숨졌다고 나오며 그 외에도 적탄에 부상한 사람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4. 명량해협 철쇄설과 강강술래 전설

이 두가지는 모두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이며 사실이 아닙니다. 명량의 엄청난 조류를 철쇄로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당대 기록에도 전혀 나타나지 않으며 자원 부족에 시달린 이순신이 이런 일을 할 이유도 없고, 부임으로부터 명량해전까지 이런 설치를 할 시간도 부족했습니다. 그 이전에 만들어 뒀을 수도 있다고요? 전장이 경상도 바다였는데, 전라도 서쪽 끝에 왜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_-;;

4. 명량해전의 결과

명량해전 후 이순신은 계속 전선에서 후퇴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일단 격전 후에 바로 당사도로 이동하는데, 전라우수영 위치에서 보면 상당히 멉니다. 지도를 한 번 볼까요.

발로 그린 건 아닙니다... 마우스질의 한계가 보이네요.

기왕 그리는 김에 이순신이 부임 받은 이래 이동한 모습을 경로에 넣어보았습니다. 명량의 위치를 잘 파악하시기 바랍니다.

지도 상에 자온도와 안좌도 사이 쯤에 동그라미 표시된 부분이 당사도입니다. 목포시보다도 위에 있죠.

이날이 당일이니까 9월 16일.

9월 17일에는 신안군의 어의도에 도착해서 하루를 정박합니다.
9월 19일에는 법성포에 도착.
9월 20일에는 위도에 도착.
9월 21일에는 고군산도에 도착. 이곳에서 머물면서 장계를 올리고 공무를 처리하며 지냅니다.

10월 3일 남하를 하여 법성포에 도착합니다.
10월 9일 전라우수영으로 귀환합니다.

우수영은 황폐해진 상태이고 해남에는 일본군이 진을 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일본군은 다음날 이순신이 돌아왔다는 것을 알고 불을 지르고는 도망쳐버립니다.

10월 29일 이순신은 고하도로 진영을 옮깁니다. 위 지도에서 선이 연결되지 않은 채 있는 목포 앞의 붉은 동그라미가 고하도입니다. 이순신은 이곳에서 겨울을 납니다.

이순신이 서해를 종단한 것은 몇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합니다. 하나는 보급이고, 둘은 일본군에 대한 무력 시위였다는 것이 학계의 의견인 것 같습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10월 7일의 난중일기 부분입니다.

7일 갑자. 바람이 순하지 않고 비가 오다 개다 했다. 소문에 호남 안팎에 적의 자취가 완전히 없어졌다고 한다.

9월 22일에는 구례에서 의병이 일어납니다. 왕득인이라는 지역 양반이 일으킨 의병인데, 이들은 전멸당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후 구례에서는 11월에 다시 한 번 의병이 일어납니다.

일본군은 칠천량 해전으로 시작한 정유재란에서 두 달만에 충청도까지 점령하며 다시 기세를 떨쳤습니다. 이때 조선 수군을 격멸하는데 성공했다면 보급을 받아서(일본 수군은 상륙하면 육군 병력이 된다는 점도 생각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북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명량에서 패배했을 뿐만 아니라 이순신이 북상하기 시작했다는 정보는 일본군에게 충분히 압박으로 작용했으리라 봅니다. 일본군은 물러나기 시작했고 조명연합군은 서서히 남진하면서 일본군을 압박하게 되죠.

명량해전이 없었다면 임진왜란은 더 오래 더 큰 피해를 주며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명량해전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내용 : http://blog.naver.com/halmi/220100517396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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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까마구둥지 : 명량해전의 '유형전투력' 분석연구 (2014. 6 논문) 2014-08-30 11:32:27 #

    ... 은 저널의 '성종대 고려군'에 대한 논문때문인데 최근 우연히 읽게 되었습니다). 글을 쓰려고 준비하다 검색해 보니 얼마전 초록불님이 다루신 명량해전에 대한 글 (링크)중 천하귀남님의 정보로 이 논문을 소개하신 바가 있더군요. 이 논문은 시의적절하게 나와서 앞으로 많이 주목받을 듯 합니다. 논문 제목은 '칠천량해전과 명량해전의 ... more

덧글

  • 연성재거사 2014/08/24 13:33 #

    명량해전 때 일자진을 폈다는 근거는 이민서가 지은 명량대첩비입니다. 여기에 뱃머리를 나란히 하고 중류로 나아가 막고 있었다고 했는데, 뱃머리를 나란히 하고 해협을 막는 진형은 일자진으로 보는 게 제일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문제는 이게 100여년 뒤의 기록인데다 난중일기와 안맞아서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는지 의심스럽다는 겁니다.-_-;
  • 초록불 2014/08/24 13:39 #

    하하, 바로 근거가 나와주는군요. 당대 지휘관의 기록을 무시하고 따라야할만큼 사료 가치가 높은 건 아니군요.
  • 연성재거사 2014/08/25 10:48 #

    제가 이 댓글을 놀러 가서 자료를 안 찾아보고 기억에 의존해 쓰다 보니 명량대첩비밖에 생각이 안 났는데, 다시 찾아보니 이식이 지은 시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일자진이라고 직설적으로 쓰여 있습니다. 트랙백으로 포스팅해서 올리겠습니다.
  • 초록불 2014/08/25 10:49 #

    아, 그렇군요. 트랙백 기다리겠습니다.
  • 연성재거사 2014/08/31 11:01 #

    트랙백으로 썼지만, 난중일기의 기록과 안 맞다는 걸 감안하면 일자진의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트랙백에서 안 쓴 부연설명을 좀 더 하자면, 이식의 시장에 처음 기록되어 있지만 좀더 시간적, 가족관계에서 가까운 이분의 행장이나 윤휴의 유사에 그런 설명이 없다는 걸 감안하면 신빙성은 더욱 낮아집니다.
  • 2014/08/24 14:05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4/08/24 21:32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앨런비 2014/08/24 14:23 #

    우수영 설의 경우는 그냥 무시할만한 설은 아닌데, 그래도 울돌목설에 비해서는 설득력이 떨어지는 편입니다-_-; 대신 명량해전에서 울돌목의 가장 좁은 지점에 버티고 싸웠는가에선, 그보단 약간 북쪽에서 싸웠을 가능성이 높은 편이죠.

    한편 이 썰에서 문제는 김억추의 배는 어디에 있어야 하냐는 것(...) 그래서 어이하든 울돌목설이 주설이 되고, 우수영 앞바다 설도 가능성이 개무시수준은 아니다. 이정도로 봐야죠.
  • 초록불 2014/08/24 21:32 #

    김억추의 배 위치는 확실히 모순이 있네요. 이순신이 꼴보기 싫어서 멀찍이 내빼 있었다고 과장한 것일 수도 있긴 하겠지만...
  • 천하귀남 2014/08/24 15:41 #

    국방부 군사편찬 연구소의 간행물인 군사 2014년 6월 내용에 일자진 관련 언급이 있는데
    화포 사거리를 고려할때 울둘목에서 약간 뒤로 물러난 지점에 포진해 제일 좁은 울둘목 자리를 통과하는 왜선을 상대할때 승산이 높다고 하는군요. 울돌목 자리는 수류등으로 동시 통과가능한 왜선의 수가 크게 제한되 이걸 포격으로 요격하기가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경우 조선 함대 위치는 제일 좁은 울둘목의 약간 뒤이긴 해도 판옥선간의 공간등을 고려할때 모든 배가 일자로 늘어서기는 힘들다고 합니다.

    칠천량해전과 명량해전의 유형 전투력 분석
    http://www.imhc.mil.kr/user/imhc/upload/pblictn/PBLICTNEBOOK_201406230414235090.pdf

    이것이 추정에 의거한 근거긴 한데 모든배가 일자진을 구성할만큼 뒤로 물러났다면 그만큼 많은 왜선이 달려들 공간을 주게 되어 불리했을 거라는 추정이 타당성 있어보입니다.
  • 초록불 2014/08/24 21:42 #

    그렇군요. 역시 일자진은 아니다라는 이야기인데...
  • 明智光秀 2014/08/24 17:10 #

    http://blog.naver.com/halmi/220100517396
    이렇게 실컷 정리해놓고,
    1. 명량해전의 실제 위치 문제라든가,
    2. 대장선 혼자 닻을 내렸다? 일자진이다?
    요건 일부러 뺐습니다 ;;;
  • 초록불 2014/08/24 21:42 #

    링크를 본문에 삽입했습니다.
  • 2014/08/24 17:47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4/08/24 21:43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4/08/24 20:39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4/08/24 21:43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존다리안 2014/08/24 20:51 #

    명량에서는 일단 급한 불을 끈 셈이라고 봐야 할까요?
  • 초록불 2014/08/24 21:44 #

    그런 셈이죠. 명량해전 하나로 전세가 완전히 달라졌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의의는 충분히 있었던 전투였다고 봅니다.
  • Cene 2014/08/25 22:10 #

    스탈린그라드같은 느낌이네요
  • 김우측 2014/08/25 01:33 #

    명량해전의 전투가 과연 어떻게 흘러갔는가 궁금해서 이것저것 찾아보긴 했는데.. 딱히 대단한 전술이 쓰여졌다기 보다는 1) 좁고 얕은 해협을 지나오느라 세키부네등 작은 적선들만 오게 만들고 2) 좁아서 적들이 한꺼번에 공격할 수 없는 바다에서 3) 높아서 백병전이 힘들고 화포가 많은 판옥선 중에서도 4) 전투력 높은 이순신의 대장선이 홀로 좌충우돌하며 기세를 올리고 5) 나머지 판옥선들이 가세해서 격퇴했다. 이정도로 봐도 되는건가요?

    즉, 1) 좁은 곳이어서 왜군의 숫적우세가 사용되기 힘들었고 2) 판옥선 짱짱맨?
  • 초록불 2014/08/25 10:33 #

    만일 (1)번이 이순신이 의도한 것이라면 그야말로 대단한 것이겠습니다. 저는 그 점에는 확신이 없습니다. (2)번은 확실히 이순신이 의도한 바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역시 명량을 막았느냐, 우수영 앞바다에서 싸웠느냐에 따라 갈라질 수 있는 부분이겠습니다.

    사실 제일 무서운 부분은 (4)번이라 하겠습니다. 엄청난 적선 앞에서 뒤따르지 않는 함대를 두고 홀로 진격해서 격퇴를 했다는 것은 장졸들의 충성심 확보와 평상시 훈련이 재대로 되어 있음을 증명하는 부분이죠. 잘 아시겠지만 제대로 훈련이 되지 않은 병사는 위기의 순간에 매뉴얼대로 움직일 수가 없는 법이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없으니까요.

    판옥선이라는 하드웨어가 훌륭했다는 것은 기본이고, 그 안에 탑재된 병사들이라는 소프트웨어가 뛰어났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또한 지리를 잘 이용한 점은 그것이 의도적이건, 우연이었건 간에 매우 훌륭한 점이었죠. 이순신이 전투 후에 이번 일은 천행이었다고 말하는데, 그만큼 어려운 싸움이었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 존다리안 2014/08/25 22:30 #

    전 1번이 이순신의 의도대로라고 생각합니다.
    최소 사마의급의 전략가인 이순신이라면 이정도는 가능할지도 모르죠.
  • 2014/08/25 07:10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4/08/25 10:35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라라 2014/08/31 01:29 #

    1. 9월 7일 야습 예견은 어떻게 한 건지 기록이 있는자요?

    2. 조선 수군이 육지에 내려 육군이 된다해도 일본군에게는 바다에 있을 때만큼

    위협이 되진 않을텐데

    북상하며 무력시위하는게 위협이 된다는게 이해가 잘 안됩니다.


  • 초록불 2014/08/31 07:24 #

    1. 난중일기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만 이유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일기의 기록에 의거해서 생각해보면 이순신은 침입한 왜선을 쫓아가다가 복병이 있을 것 같아서 물러납니다. 복병이 있었다고 보았으니 매복 공격에 실패한 이들이 야습으로 작전을 바꾸리라 예측한 것 같습니다.

    2. 물론 이 부분은 추측에 의한 것인데, 원래 충청도에 머물렀던 일본군은 해상 보급을 받고 북진하려고 했던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서 전멸했으니 해상 보급은 당연한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구역에 이순신의 전함이 등장하면 일본 수군의 진격이 실패했다는 것을 명백하게 알리게 되기 때문에 무력 시위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라라 2014/08/31 08:17 #

    2. 일본군도 정보 전달 체계가 있으니 명량 패전 정도는

    무력시위 안 해도 이미 알고 있지 않았을가 싶은데.

    다른 목적도 있지 않았을가 싶네요

  • 초록불 2014/08/31 08:58 #

    다른 목적이 더 중요한 목적이었는데 본문에 적은 바대로 "보급"입니다. 또한 전라도의 아군에게 수군의 승리를 알리는 것도 중요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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