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문노 - 한자명은 文弩. 538-606 화랑세기에 나오는 사람. 진흥왕 때 한산 전투 및 관산성 전투에 참여했고 사다함의 스승이다. 6세기의 인물로 본래 대가야 출신이다. 8세 풍월주다.
두번째 문노 - 한자명은 文努. 삼국사기에 나오는 인물로 삼국사기 김흠운 열전에 나온다. 김흠운이 화랑 문노의 아래에 있었다고 나온다. 위의 문노와는 연대가 맞지 않아 동일 인물이 아니다. 김흠운은 첫 출전에서 전사하는데 그때가 655년(태종무열왕 2년)이다. 이때 그는 태종무열왕의 사위로 최소한 두 명의 자식이 있었다. 이때가 첫출전이었다는 점을 고려하고 밑에 계산하겠지만 작은 딸의 나이로 보면 젊은이였던 것이 분명하다. 606년에 죽은 문노의 휘하에 있을 가능성은 전무하다.
뒷날 작은 딸이 신문왕의 왕비가 된다. 그때가 683년(신문왕 3년)이고 후일 신목왕후라고 불린다. 즉 최소한 23살이었다는 이야기고(이것은 고대에 조혼이 없었다는 증거 중 하나다) <황복사 석탑 금동사리함명>에는 효소왕 9년(700년)에 죽었다고 나온다. 즉 마흔 여섯 쯤에 죽었다는 이야기... (<속일본기>에도 이때 왕모(효소왕의 어머니니까)의 죽음을 조문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효소왕 9년 조에 "목성이 달쪽에 들어갔다"는 구절이 있다. 이것이 왕모의 죽음과 연관이 있는 걸까? 신문왕의 어머니는 김유신의 동생으로 가야계다. 김흠운의 윗사람이었던 문노가 가야계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이때 김유신의 영향으로 가야계는 득세하고 있었다.
세번째 문노 - 한자명은 文奴. <일본서기>에 나온다. 588년 백제는 일본에 대량의 기술자를 보낸다. 그중 한사람의 이름이 麻那文奴다. 이 사람들은 일본에서 아스카사(飛鳥寺)를 짓는다. 마나문노는 기와를 제작하는 와박사 중 하나였다. 이 절은 596년에 완성된다. 대가야는 562년 신라 장군 이사부와 사다함에 의해 완전 복속되지만 588년이라면 불과 26년 차이. 1세대가 채 지나가지 않은 시점이다. 마나문노도 가야계일 가능성이 있다.
위 세사람이 다 가야계이건 아니건 간에 <문노>라는 이름은 오늘날의 <철수>처럼 인기 있는 이름이었던 것 같다. 문노의 <노>는 그것이 奴든 弩든 世와 통하는 글자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저 이름 문노는 문세와 같은 뜻... 이문세라는 이름의 유래가 여기에?) 단양적성비에는 內로도 표기되어 있으며 儒도 같은 뜻으로 본다. 이 글자를 <누리>로 독음하는 경우도 있다. (발음을 섞어서 빨리 해보면 뇌 정도가 될 수도 있다.. 그럼 무뇌충의 유래는 여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