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평행세계의 하루 *크리에이티브*



김 대리, 식사 가지?”

, 과장님. 철균 씨도 가자.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서류철에 코를 들이박고 있던 철균이 일어나면서 세 사람은 점심 식사할 식당을 찾아 사무실에서 나왔다.

 

뭘 먹을까?”

 

직장인의 가장 큰 고민, 점심식사 메뉴 고르기. 사무실에서 나오기 전에 정하면 좋겠지만 그렇게는 잘 되지 않는다. 일단 식당들이 밀집한 거리 쪽으로 향하면서 류 과장이 한 마디 던지는 것이 관례.

 

전 요새 양식이 좀 땡기는데, 과장님은요?”

 

김 대리의 말에 류 과장이 고개를 젓는다.

 

양식은 느끼하잖아. 별로야.”

 

김 대리가 자기 주장을 다시 편다.

 

느끼하지 않은 양식도 많아요. 다채로운 맛들이 있다고요.”

 

류 과장이 살짝 미간을 찌푸린다.

 

자네 또 아이들이나 먹는 해리 포터같은 거 먹자고 그러는 거야?”

아니, ‘해리 포터가 뭐 어때서요? 그보다 좀 더 숙성된 맛을 내는 트와일라잇은 싫으세요?”

, 그건 여자들이나 먹는 거지. 어찌 남자가...”

 

철균이 이야기에 끼어든다.

 

최근에 인도 식당이 문을 열었던데 거긴 어떨까요?”

인도 음식이라고 해봐야 타고르 풍 시나 무슨 고대 음식들, 그 이름이 뭐더라...”

“‘리그 베다?”

그래, 뭐 그런 고리타분한 것들 뿐이잖아?”

 

김 대리가 방향을 바꿔본다.

 

그럼 중국 식당은 어떨까요? 아무래도 종류가 많으니까요.”

중국 식당은 괜찮지. 그런데 삼국지수호전같은 건 어려서부터 너무 먹어서 질리니까 좀 다른 걸 먹었으면 좋겠는데?”

그럼 정력에 좋다는 금병매같은 걸로?”

 

김 대리가 으흐흐 하고 음흉한 웃음을 흘린다.

 

힘 쓸 데도 없는데 그딴 걸 먹어서 뭐 하나? , 봄이 되니까 영 입맛이 없네.”

 

철균이 다시 제안을 한다.

 

값 싸고 질이 괜찮다는 식당이 생겼다는데 거긴 어떨까요?”

어떤 음식이 있는데?”

이번에 등단한 신인들 레시피가 나온다고 하는데요, 저도 먹어본 게 없으니까 잘 몰라요. 매일매일 다른 걸 먹어보는 거죠.”

어떤 때는 나름 먹어볼 만한 게 나오지만, 요샌 무슨 상 받았다는 음식도 실제로 먹어보면 영 내용이 부실해서 별로인 경우가 많더라고.”

 

류과장이 식당들을 두리번거리며 살핀다. 이야기하는 동안 식당 거리에 도착해버린 것이다.

 

저 집은 어때? 역시 우리 입맛에는 무협이 좋잖아?”

무협은 한 물 갔다고 하던데요. 요새도 먹을 만한 게 있나요?”

왜 이래, ‘군림천하는 먹을수록 감칠 맛이 도는데.”

아유, 그건 저 꼬꼬마 때부터 먹던 거라... 뭐 좀 참신한 건 없나요?”

온고이지신이잖아. 요새 새로 나온 건 그다지 먹어본 게 없어서...”

 

김 대리가 말했다.

 

그럼 무협 맛도 좀 들어가고 판타지 맛도 좀 들어간 거 어떨까요? ‘뫼신 사냥꾼으로 한 끼 떼우시죠.”

그것도 괜찮겠군.”

 

철균의 의향은 묻지도 않고 두 사람이 앞서서 새파란상상 체인점 식당으로 쑥 들어가버렸다.

 

여기 뫼신 사냥꾼세 그릇 주세요.”

, 과장님 저는 곱배기로 할게요.”

 

철균이 손을 들더니 말한다.

 

저는 좀 다른 걸로 할게요. ‘뫼신 사냥꾼은 한 번 먹기 시작하면 몇 달은 그것만 먹어야 끝을 보는 거라 좀 질려서요.”

맨날 먹을 필요는 없잖아. 가끔 먹어도 돼.”

아니, 그럼 앞의 맛을 다 잊어버려서 좀 그래요. 저는 이번에 새로 나온 눈사자와 여름주세요.”

어라? 그건 여자들이나 먹는 거 아니야?”

음식에 남녀가 어디 있나요. 레시피 개발한 사람이 여자라고 해서 그렇게 말하는 건 실례죠. 이게 나름 추리물이라 남성용으로 봐도 돼요.”

, 그래 난 또 누가 로맨스물이라고 해서...”

로맨스물이면 향신료를 훨씬 강렬한 걸 써야죠. 이것도 나름 강하긴 하지만 로맨스물 양념은 많이 안 들어가요.”

 

류 과장은 그런 철균이 신기한 모양이다.

 

, 남들은 허풍이 들어간 걸 먹으면 머리가 아프네, 현기증이 나네 이런 소리를 하지만 난 역시 허풍이 좀 들어간 걸 먹어야 맛이 좋더라고.”

음식 못 하는 집이 허풍 범벅으로 내는 거 아닌가요?”

그냥 들이붓지. , 전에 허풍을 안 넣고 만드는 명가라고 소문난 음식점에 가 본 적도 있는데, 내놓은게 뭐였더라? ‘월락검극 천미명을 살짝 변형한 거더라고.”

그건 그냥 허풍범벅 요리잖아요?”

그래. 그런데 심지어 오리지날도 아니어서 이건 뭐 입에 대기가 민망할 정도였지.”

요새 창의력 없이 남의 레시피를 베껴서 새 이름 붙인 음식들도 참 많더라고요.”

모를 줄 아는 모양이야. 그것도 일종의 습관이더라고.”

 

그때 음식이 나왔다. 깔끔하게 비닐 포장되어 여섯 쪽의 모조지에 잘 배열된 음식들이었다.

 

김 대리는 벌써 3권인가? 난 아직도 1권 중반인데.”

이게 맛 들이면 자꾸 손이 가게 되어서요.”

곱빼기로 먹으니까 빨리 빨리 나가는 거겠지.”

철균 씨 거는 맛이 어때?”

 

철균 씨는 킥킥 대며 눈사자와 여름을 먹다가 말했다.

 

이게 배합이 절묘한데요. ‘코믹양념이 절묘하게 스며들었어요. 저 원래 코믹양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이건 괜찮은데요. 안 질리겠어요.”

 

류 과장은 신기하다는 듯이 철균을 바라보았다.

 

코믹양념은 디저트에나 들어가야 하는 거 아냐?”

그건 과장님 선입견이고요. 원래 정통 디저트에는 잘 안들어가요.”

 

마침 식사를 마친 뒤에 쉐프가 나와서 디저트라고 모조지 한 장씩을 내밀었다.

 

, 배부른데. 이건 뭐지?”

 

쉐프가 깊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시 한 접시씩입니다. 짧은 것이라 부담 없이 드시기 좋습니다.”

 

김 과장은 손사래를 쳤다.

 

, 난 별로. 요새 시 디저트는 도통 무슨 맛인지 모르겠더라고. 공연히 기분이 나빠질 때도 있어.”

 

쉐프가 웃으며 말했다.

 

김 과장님 취향은 제가 잘 압니다. 이건 전설의 명 쉐프 김소월님의 시니까 마음에 드실 겁니다.”

, 그런 고전 명작을 만들 줄 알아?”

 

김 과장이 반색하며 받아들었다. 한 번에 홀짝 먹어버린 김 과장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젊은 두 직원에게는 그리 환영받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나쁜 평을 듣지도 않았다.

 

저녁에 야근해야 할 것 같은데, 뭐 시켜 먹을까?”

 

김 대리가 대답했다.

 

야근에는 역시 SF 한 그릇이 제격이죠.”

“SF, 철균 씨 생각은?”

전 아무 거나 상관없습니다. 아니, 그래도 너무 딱딱한 건 말고요. SF 중에는 너무 딱딱한 것들이 있더라고요.”

그건 철균 씨가 아직 SF의 참맛을 몰라서 그래. SF는 딱딱한 게 제 맛이야.”

, 그래도 저는 이가 아파서 못 먹겠더라고요. 좀 부드러운 걸로 부탁드릴게요.”

, 그래? 그럼 뭘 시키지? ‘은하영웅전설은 사실 SF 색깔만 띤 거라 좀 그런데...”

 

류 과장이 말을 받았다.

 

, 딱딱한 거랑 부드러운 거랑 대충 잘 섞은 거 있잖아. 반반SF라는 거. 그런 걸로 시키면 돼잖아.”

, 그럼 링월드로 시키겠습니다. 이게 딱딱한 거 싫어하는 사람은 그냥 빼고 먹어도 맛있는 거라서요.”

오케이, 저녁 메뉴까지 정해지니까 아주 마음이 놓이는군.”

 

세사람은 사무실 앞에 와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런데 자네들, 요즘 야근이 잦아서 책 볼 시간은 별로 없겠군 그래?”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시간이 좀...”

저도 요새 베트남 쌀국수 한 번 읽어보고 싶은데 영 손이 안 가네요.”

그거 되게 인기던데, 언제 같이 읽어볼까? 난 평양냉면을 한 번 읽어보려고 맘만 먹고 있어.”

책 보는 게 음식 한 끼나 마찬가진데 왜 그리 잘 안 되는지 몰라요. 전 아직도 팔보채, 류산슬 같은 건 이름만 들어봤지, 읽어보진 못했으니까요.”

너무 무식해지면 일하는데도 힘드니까 교양 삼아 책도 좀 봐야지. 이번 주만 고생하면 다들 정시 퇴근하도록 해. 보고 싶은 책도 좀 보고...”

 

류 과장은 지난 주에도 한 대사를 똑같이 하고는 사무실 문을 열었다.


덧글

  • sharkman 2015/03/21 21:34 #

    기승전광고...
  • 초록불 2015/03/22 16:41 #

    기승광고결입니다...^^
  • 잭 더 리퍼 2015/03/21 22:52 #

    한정식집 가서 9첩반상 나오는 구운몽이나[...]
  • Fug 2015/03/21 22:58 #

    기억하기론 그건 음흉한...
  • 잭 더 리퍼 2015/03/21 23:09 #

    //Fug
    아들이 홀로계신 어머니를 위해 만든거니 괜찮습니다
  • 위장효과 2015/03/22 12:20 #

    구운몽이 부담되시면 중화요리집에서 녹정기로 드시면 됩니...(퍽)
  • 초록불 2015/03/22 16:51 #

    훌륭합니다... 구첩반상...
  • Fug 2015/03/21 22:59 #

    한달전부터 인간실격으로 때웠는데
    반쯤 보다보니 맛을 실격해버린.. ㅜㅜ
  • 2015/03/22 02:29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5/03/22 16:51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LVP 2015/03/22 10:03 #

    읽다보면, 어째 '서양 문명'이 쬬그라들은 세계 같기도 한 것 같기도 한 것 같지 않은것 같은 그....'ㅅ';;;;;;;;;;;;;;;;;;;;;
  • 초록불 2015/03/22 16:52 #

    평행세계입니다...^^
  • 철갑군 2015/03/22 14:26 #

    추천도서들인가요?
  • 초록불 2015/03/22 16:52 #

    읽어보시면 후회할 책은 없습니다...^^
  • 까마귀옹 2015/03/22 15:11 #

    그럼 '어린이용 세계명작 전집'은 김밥천국일까요? 다양한 음식을 먹을 수는 있지만 막상 제대로 된 음식은 없는 곳?
  • 초록불 2015/03/22 16:52 #

    어린이용 불고기 버거 같은 거죠...^^
  • 까마귀옹 2015/03/22 15:12 #

    그리고 피네간의 경야 같은 괴악한(...) 책들은, 저 쪽 세계에선 어마어마한 괴식 정도로 취급받겠군요.
  • 초록불 2015/03/22 16:54 #

    웬만한 사람이 먹어서는 소화불량이 걸리는 그 음식 말씀이군요.
  • 알렉세이 2015/03/22 19:13 #

    메뉴 정하기가 매우 까다롭군요.^^;
  • 초록불 2015/03/23 17: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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