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강지리지 사료 비판 *..역........사..*



지난 2015년 11월 16일 국회의원 회관에서 한국상고사 대토론회라는 것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한밭대 공석구 교수의 발표는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한 번 정리해 놓기로 한다. 이 정리는 주로 공석구 교수의 논문에 의한 것이나 곳곳에 내 견해가 삽입되어 있다는 점을 밝혀둔다.

낙랑군 위치 논쟁에서 현 평양과 평안도 일대의 고고학적 유물을 무시하며 요서 일대를 낙랑군의 위치, 곧 고조선의 중심지였다고 주장하는 강력한 근거는 <태강지리지>라는 책이다.

이 책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여러 사서에 그 기록이 남아 있어서 책 자체의 실존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太康地志云, 樂浪遂城縣 有碣石山,長城所起.
태강지지에 전하기를, 낙랑군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는데 장성이 여기에서 시작한다.

위 내용은 <사기> 하본기의 하우 편 주석인 '사기색은'에 나오는 것이다. 오늘날 장성, 즉 만리장성은 북경 동남쪽의 갈석산에서 시작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위치가 분명한 곳이 바로 낙랑군 수성현이라면 낙랑군이 그곳이었으며 낙랑군 조선현이 고조선의 수도였다면 이 부근이 바로 고조선의 중심지가 된다는 것이다.

고조선이 크고 위대해야 하는 입장에서 고조선이 한반도의 평양이 아니라 만주 벌판에 있어야 한다고 믿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이 사료는 매우 귀중한 것이었다. 그리고 요동을 넘어서 요서까지 고조선의 영역이었다 하면 더욱 반가울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논리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어찌 되었든지 간에 결국 고조선이 한나라에 점령되고 그 중심지가 한나라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점은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식민지"라는 것은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와는 개념이 전혀 다른 것이지만 이쪽 사람들은 그런 점에는 별 관심이 없다.)

따라서 이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더욱 이상한 논리가 등장한다. 한무제가 점령한 곳은 거대한 고조선 제국의 변방국에 불과하며, 이곳은 기자의 후예가 다스리다가 위만에게 빼앗긴 땅이라는 논리였다. 그러나 한나라와 그 이후의 사서 어디에도 이 거대한 고조선이 언급되지 않는데도 이런 망상을 하는 것은 참 재미있다.

물론 이런 문제는 거론하지 않은 채 그냥 고조선이 거대했다고 주장하기만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고조선이 한나라에 멸망했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한다. 그럼 도대체 만리장성은 어떻게 건축되어 있는 것일까? 고조선 중심지에 한나라 사람들이 만리장성을 쌓는 것을 고조선은 그냥 지켜보기만 했다는 이야기이다. 이게 말이 되나?

진시황도 갈석산에 올랐는데, 진시황은 고조선의 중심지에 있는 갈석산에 외국 정상으로 초대받기라도 했다는 말일까? 이런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이 사람들은 진시황이 오른 갈석산은 중국 땅에 있던 다른 갈석산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갈석산은 분명한 지표니까 그 위치를 기준으로 낙랑과 고조선을 찾을 수 있다는 주장과 배치되는 것인데, 물론 이런 생각은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다.

이처럼 <태강지리지>의 기록은 기록 자체가 이상하기 때문에 역사학계에서 중요하게 취급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모순된 기록을 가지고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용하는데 도가 튼 유사역사학에서 이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온 것이 사실이다.

<태강지리지>에 대해서는 노태돈이 '고조선 중심지의 변천에 대한 연구'(<단군과 고조선사 연구>, 사계절, 2000)에서 언급한 바가 있다. 여기서 노태돈은 <태강지리지>가 태강3년(282년)에 편찬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태강7년에 개명된 합포라는 지명이 수록되어 있는 점을 들어 최소한 태강7년(286년) 이후의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노태돈은 낙랑군 수성현에서 장성이 시작된다는 기록은 진나라 장군 당빈이 만리장성을 복구한 기록과 혼란이 일어나면서 벌어진 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 토론회에서 공석구 교수는 <태강지리지>에 대한 사료 비판을 처음으로 시도했다.

낙랑군에 수성현이 있었다는 사실은 <한서> 지리지에 처음 나온다. 낙랑군 조에 '수성'이라는 현명이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 수성현에 갈석산이나 진장성이 등장하는 사료들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A-1 : (平州) 樂浪郡 <漢書> (중략) 遂城<秦長城之所起> (<진서> 권14 志4, 지리 상 평주 낙랑군) - 648년
A-2 : 太康地志云, 樂浪遂城縣 有碣石山,長城所起. (<사기> 권2, 하본기 제2의 주석에 인용된 "사기색은") - 8세기
A-3 : 盧龍 <漢肥如縣有碣石山 碣石而立 在海旁, 故名之, 晉太康地志同 秦築長城 所起自碣石, 在今高麗舊界, 非此碣石也> (<통전> 권178, 주군8, 古冀州 상, 노룡현) - 801년
A-4 : 碣石山 在漢樂浪郡遂城縣 長城起於此山. 今騐 長城東戴遼水 而入高麗 遺址猶存. (<통전> 권186, 변방2, 동이 하, 고구려) - 801년
A-5 : 晉太康地志云 秦築長城 起自碣石. 在今高麗舊界 非此碣石也. (<태평환우기> 권70, 하북도19 평주 노룡현) - 979년
A-6 : 碣石山 在永平府昌黎縣西北二十里 (중략) 秦築長城, 起自碣石, 此碣石在高麗界中, 亦謂之左碣石<杜佑曰 秦長城 所起之碣石, 在漢樂浪郡遂城縣地. 今犹 有長城遺址, 東戴遼水 入高麗, 隋大八年, 伐高麗, 分遺越孝才 出碣石道. 是也> (중략) 此皆傳譌也. (<독사방여기요> 권10, 북직1, 갈석) - 1678년 (공석구 교수의 발표문에는 A-4와 A-5가 뒤집혀 있는데, 여기서는 연대순으로 맞춰 놓았다.)

사료 A의 낙랑군 위치를 평양 일대로 파악하는 견해는 일본학자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에 의해서 나왔다. 1910년에 이나바는 만리장성의 동단을 대동강 부근의 수안 일대로 비정했다. 그는 A-1, A-2, A-5를 근거로 만리장성의 동단을 수안이라고 주장했다.

중국에서는 왕국량(王國良)이 같은 주장을 내놓았다. 왕국량은 1928년에 내놓은 <중국장성연혁고>(상무인서관 30쪽)에 실은 지도에서 황해도 수안에서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지도를 그려넣었다.


흔히 이병도가 낙랑군 수성현 진장성론을 주장해서 중국의 담기양(譚其驤)이 그걸 답습했다는 식의 마타도어에 익숙한데, 알고보면 일본과 중국의 학자들이 이런 주장을 했고 이병도는 이런 주장을 "맹랑한 설"이라고 일축한 바 있다. 사실 관계를 확인치는 않았으나 어쩌면 이나바의 주장을 왕국량이 받아먹었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사료 A의 위치를 낙랑군 요서 지역으로 해석하는 견해는 윤내현, 복기대, 이덕일 등이 하고 있다.

이 점으로 보면 사료 A의 낙랑군을 평양으로 보는 것은 식민사학, 동북공정의 논리로 보인다. 당연히 반대편은 정의의 우리 편으로? 그럴 리가 있나. 이제 본격적인 공석구 교수의 사료 비판을 감상하자.


1. 사료 A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A-1과 기타.
2. A-1은 낙랑군 수성현과 진장성.
3. 기타는 낙랑군 수성현과 진장성과 갈석산.


이 점을 기억하고 후대 사료부터 역순으로 검토한다.

따라서 첫번째 분석 대상은 <독사방여기요>이다. <독사방여기요>의 내용을 통전과 비교해보자.

<통전>
晉太康地志同 秦築長城 所起自碣石, 在今高麗舊界, 非此碣石也.
碣石山 在漢樂浪郡遂城縣 長城起於此山. 今騐 長城東戴遼水 而入高麗 遺址猶存.
<독사방여기요>
碣石山 在永平府昌黎縣西北二十里 (중략) 秦築長城, 起自碣石, 此碣石在高麗界中, 亦謂之左碣石<杜佑曰 秦長城 所起之碣石, 在漢樂浪郡遂城縣地. 今犹 有長城遺址, 東戴遼水 入高麗, 隋大八年, 伐高麗, 分遺越孝才 出碣石道. 是也> (중략) 此皆傳譌也.


<독사방여기요>는 "두우가 말하길"이라고 써서 <통전>을 참고 하였음(두우는 <통전>을 지은 사람)을 분명히 하고 있는데, <독사방여기요>를 지은 고조우는 <통전>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것은 <독사방여기요> 권38 산동9 외국부고, 점제성의 수성폐현 조에 두우의 말을 다시 적은 뒤에 "모두 본래 태강지지의 설인데 그것은 실제는 잘못된 것이다."라고 적어놓은데서 알 수 있다.

따라서 <독사방여기요>의 내용은 <통전>에서 가져온 것이고 그것을 잘못된 거라고 생각한 만큼, 참고 사료로서의 가치가 없다.

두번째는 <태평환우기>의 분석이다.

<통전>
晉太康地志同 秦築長城 所起自碣石, 在今高麗舊界, 非此碣石也.
<태평환우기>
晉太康地志云 秦築長城 起自碣石. 在今高麗舊界 非此碣石也.


글자 두 개만 다르고 똑같다. <통전>에 나오는 동同은 운云의 오자일 것으로 보이므로 사실은 한글자만 다를 뿐이다. 따라서 <태평환우기>는 <통전>을 베꼈을 뿐으로 독자적인 사료 가치가 없다.

세번째로 <통전> 차례다.

<통전>
晉太康地志同 秦築長城 所起自碣石, 在今高麗舊界, 非此碣石也.
碣石山 在漢樂浪郡遂城縣 長城起於此山. 今騐 長城東戴遼水 而入高麗 遺址猶存.

<통전>은 노룡현 조(A-3)와 고구려 조(A-4)의 두 개 지역에서 갈석산을 소개하고 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노룡현 조에서는 진나라가 쌓은 장성이라고 말하고 잇고, 고구려 조에서는 그냥 장성이라고만 쓰고 있다. 그런데 내용이 이상하다. "장성이 동으로 요수를 건너 고려로 들어가고 그 유적이 아직도 존재한다."라고 말한다. 두우가 <통전>을 썼을 때는 고려(고구려)가 없었다. 더구나 저 말대로라면 갈석산에서 장성이 시작되어 고려로 들어간다는 말이 된다. 갈석산에서 장성이 북방을 막기 위해 서쪽으로 뻗어있다는 사실과도 맞지 않는다. <통전>의 기록은 역사적 사실과 완전 배치되어 사료적 가치를 가질 수 없는 오류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네번째로 <사기색은>을 살펴보자.

여기서 먼저 <진서>를 검토해 보기로 한다. <진서>에는 <태강지리지>를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낙랑군 수성현과 장성에 대한 언급이 들어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진서>
(平州) 樂浪郡<漢置> (중략) 遂城<秦築長城之所起> (권14, 지4, 지리 상, 평주 낙랑군)


보다시피 <진서>에 "秦築長城"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이후 <통전>, <태평환우기>, <동사방여기요>에 모두 인용되었다. 그런데 진서에는 저 부분의 주석이 없다. 인용전거를 밝히지 않은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진나라가 316년에 북방의 침입으로 멸망하고 남으로 도망쳐 동진을 새로 열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이후 이 지역에 대한 정보는 불확실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진서>가 편찬된 648년은 당과 고구려가 대립하고 있던 시기로 요서, 요동에 대한 당의 영토 인식이 편찬에 영향을 주었을 점도 고려하면서 사서를 살펴봐야 한다.

<진서>의 평주 기사는 부정확한 것들이 많은데 잘 살펴보면 평주는 274년에 설치되어 282년 7월 폐지된다. 따라서 <진서> 지리지의 기록은 이 시기를 다루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이유로 중국 학자들은 황해도 수안에서 장성이 시작된다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고고학적 증거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공석구, <중국역사지도집의 평양까지 연결된 진장성 고찰>, <선사와 고대>43, 2015)

여기에서 노태돈이 검토한 바 있는 <진서> 당빈 열전을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빈(235~294)은 280~289년경에 북평 지역에서 활동했다. 당빈은 이 지역을 평정하고 온성에서 갈석까지 장성을 복구했다. 당빈의 이 활약상이 <태강지리지>에 반영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공 교수는 고고학적 자료를 이용해서 이때 갈석산은 노룡현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거기가 거기 같아서 많이들 혼동하지만 현재 갈석산은 창려현에 속하고, 흔히 우리가 보는 바닷가에 서 있는 산해관은 산해관구에 있다. 모두 친황다오시[진황도]에 속해 있기는 한데, 그 면적이 충청북도보다 크다는 것이 함정...
좌측의 붉은 선으로 표시된 곳이 노룡현. 그 우측하단에 조그맣게 보이는 연두색 점이 갈석산이다. 그리고 친황다오시라고 쓰여있는 한자 끝 부분쯤이 바로 산해관.

당빈은 북평 지역을 침공한 선비족을 물리치기 위해서 출동했다. 그가 한반도에 있는 낙랑까지 갈 일은 없다. 그리고 그가 활동한 지명에 갈석은 나오지만 낙랑군도 수성현도 등장하지 않는다.

공 교수는 당빈이 복구한 진장성의 기록이 "秦築長城 起自碣石"으로 남고 낙랑군이 이 지역으로 교치된 이후에 "樂浪遂城縣 有碣石山"이라는 기록으로 남았다가 <태강지리지>에서 두 기록히 합해진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태강지리지>가 낙랑군 교치 이후(313년 이후)에 쓰여진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과연 그러한가? 

이를 위해서는 <태강지리지> 자체의 분석이 필요하다. 이 책은 사서마다 조금씩 다른 이름으로 소개되고 있다.

<삼국지>주 : 진태강삼년지기晉太康三年地記 - 429년
<사기> 집해 : 진태강지기晉太康地記 - 5세기 중엽
<송서> : 태강지지太康地志, 진태강지리지晉太康地理志, 진태강지지晉 太康地志, 진태강삼년지지晉太康三年地志, 진태강지기晉太康地記, 잔태강기晉太康記 - 487년
<수경>주 : 태강지도기太康地道記, 태강지기太康地記. 태강기太康記, 진태강지리기晉太康地理記, 진태강지기晉太康地記, 진태강기晉太康記 - 6세기초?
<후한서>주 :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 진태강지도기晉太康地道記 - 6세기초?
<한서>주 : 태강지지太康地志, 진태강지기晉太康地記 - 6세기 중반?
<진서> :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 - 648년
<사기>색은 :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 태강지지太康地志, 태강지기太康地記, 진태강지기晉太康地記, 진태강지리기晉太康地理記 - 8세기 중반
<사기>정의 :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 태강지지太康地志, 진태강지지晉太康地志, 진태강지기晉太康地記, 진지기晉地記 - 736년
<통전> : 태강지지太康地志, 태강지기太康地記, 진태강지지晉太康地志 - 801
<태평환우기> :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 태강지지太康地志, 태강지기太康地記, 진태강지리지晉太康地理志, 진태강지리기晉太康地理記, 진태강지지晉太康地志, 진태강지기晉太康地記, 진지기晉地記 - 979년
<독사방여기요> : 태강지지太康地志, 태강지기太康地記, 진태강지지晉太康地志, 진태강지기晉太康地記 - 1678년

이렇게 다양하게 불린 까닭은(위에 적은 것들 말고 <진태강토지기>와 <태강주군현명>이라는 책도 <태강지리지>와 관련이 있을 것 같다고 공 교수는 말한다.) 이 책이 일찌감치 망실된 때문이 아닐까 추측한다. 때문에 다양한 필사과정을 거치며 책의 이름도 다양하게 분화한 것 같다.

<태강지리지>는 청대에 와서 집록이 시도되었다. 각 사서에 있는 내용을 모아 재편집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리하여 1748년 필원에 의해서 <진태강삼년지기>, 1792년 왕모에 의해서 <태강지기>, 19세기에는 황석에 의해서 <진태강삼년지기>라는 명칭으로 집록 간행되었다. 이중 가장 유명한 것이 필원이 작업산 <진태강삼년지기>이다.

위 A사료에도 책 이름이 다양하게 나오지만 A-2, A-3, A-5는 모두 같은 책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태강지리지>는 태강3년이라는 말이 계속 나오기 때문에 태강3년(282년)에 편찬된 책이라는 선입견이 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앞서 노태돈 교수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한 바 있다. 이제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필원의 책을 보면 위무제가 만든 남향군을 진무제가 순양군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나온다. 태강은 진무제의 연호이다. 진무제 살아생전에 이 책이 만들어졌다면 진무제라는 이름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최소한 진무제 이후 즉 290년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삼국지> 배송의 주에 보면 <태강지리지>를 인용해서 서진의 인구를 377만 호라고 적고 있다. 그런데 <진서>에는 태강 원년에 인구가 246만 호라고 나온다. 불과 2년 만에 인구가 이렇게 늘어날 리는 없다. 그런데 진나라는 원강 6년(296년)에 호구조사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이 인용된 것이라 생각하면 <태강지리지>는 296년 이후에 편찬된 책이 된다.

<자치통감>에 호삼성이 붙인 주석을 보면 혜제로부터 원제에 이르는 시기에 세워진 군현들이 <태강지리지>에 나온다. 원제는 재위 기간이 318~323이다. 이로 보면 <태강지리지>는 323년 이후에 편찬된 책이다.

왕모가 집록한 <태강지기>에는 당나라 현종 때 만들어진 <초학기>에 실려 있는 <태강지리지> 기록이 들어있다. 여기에는 북위 때 일이 적혀 있다. 이로 미루어 <태강지리지>는 386년 이후에 편찬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태강지리지> 자체는 태강3년에 편찬되었고 위의 자료들은 후대에 첨가된 것일수도 있다. 문제는 낙랑군 수성현 기사 역시 후대에 첨가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1차 사료로서의 가치를 부여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태강지리지>가 처음 인용된 책은 위에 나오듯이 <삼국지>에 배송이 붙인 주석이다. 배송지는 주석 작업을 429년에 했다. 따라서 <태강지리지>는 282년에서 429년 사이 언젠가 출현한 책이며 위와 같이 검토의 결과 이런 결론에 위배되는 것은 없다. 

따라서 <태강지리지>에 대한 사료 비판 없이 담기양 등이 한반도까지 그려놓은 만리장성은 완전 잘못 된 것이다. 또한 이 구절을 근거로 낙랑이 처음부터 요서 지역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잘못된 것이다. 두번째 경우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느낄 수도 있겠지만, 원래 낙랑군이 현 평양 일대에 있었다는 증거는 무수하다. 이런 교차되는 증거들에 의해서 보장되는 것과는 달리 요서 지역에 낙랑이 있었다는 주장은 교치 이전의 유일한 증거가 <태강지리지>뿐이다. 그리고 그 증거가 지금 무효 선언을 받은 것이다.

사족 : 그리고 이런 사료 비판에 대해서 이덕일은 "그런 건 중요하지 않고요"라는 한 마디로 일축하고 자기 말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

덧글

  • 리리안 2016/01/04 00:12 #

    마지막에서 참 이덕일 답다고 할 수 있군요(웃음)
  • 초록불 2016/01/04 10:57 #

    ^^
  • 漁夫 2016/01/04 00:17 #

    과학에서도 그렇듯이 사학에서도 다양한 증거의 비판과 검토는 필수인데, 그걸 안 하는 사람이라면 더 이상 '학자'가 아니겠죠.
  • 초록불 2016/01/04 10:57 #

    이덕일은 이미 오항녕 교수나 정병설 교수와의 논쟁에서도 증거의 비판과 검토에 관심도 없고 학식도 없다는 것을 증명했죠.
  • 2016/01/04 02:43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6/01/04 10:57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無碍子 2016/01/04 10:48 #

    백권의 책도 소용없게 만드는 마법의 주문 "그런 건 중요하지 않고요"

  • 초록불 2016/01/04 10:58 #

    그 사람들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죠...^^
  • 연성재거사 2016/01/04 12:40 #

    그러고보니 예전에는 오항녕 교수와 논쟁이 붙었을 때 판본 문제를 "지엽적인 문제"라고 했다가 문헌학과의 영구까임권을 먹었지요. (笑)
  • 초록불 2016/01/04 13:01 #

    대체 역사학자가 판본을 중요치 않다고 하면 뭐가 중요한지...
  • 로자노프 2016/01/04 14:09 #

    안 그래도 문정학과 교수한테 그 이야기 했더니 어떤 ㅂㅅ이 판본이 지엽적 문제라고 하냐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 요원009 2016/01/04 12:55 #

    "그런 건 중요하지 않고요"

    사학자로서의 기본을 무시하는 발언이네요.
  • 초록불 2016/01/04 13:01 #

    그렇더라고요.
  • 로자노프 2016/01/04 14:09 #

    하아...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 초록불 2016/01/04 17:26 #

    ^^
  • 덕림석 2016/01/04 15:20 #

    공석구의 교치설이 옳다고 본다.
    교치 근거는 <태강지리지>를 버리더라도 <진서>도 있고 <위서><수서>도 뒷받침한다.
    또한 <통전>도 근거 없는 것이 아니다.
    두우가 요수가 장성을 뚫고 들어간다는 것은 전국시대의 요수 곧 <수경주>의 난수이며 갈석 부근의 옛 요수를 말한 것으로 대충 이해하면 된다.

    문제는 낙랑군 교치가 아니라 갈석이 있는 곳이 한 시기 요서군 지역이라는 것이며 신채호가 말했듯이 요동군도 요서군 부근이였을 것이란 사실이다.
  • 도사세손 2016/10/12 01:09 #

    태강지리지에 있는 낙랑현, 갈석산 문제점을 잘 알것 같습니다.
    긴 글 감사 합니다.

    그런데, 한가지 질문이 있어서 글을 남깁니다.
    한서지리지에 보면 요동군 험독현이 있습니다.
    재야에서는 이 부분도 많이 거론하여 직접 찾아 읽어 보았는데요.

    험독(險瀆) 현이 있다.

    [응소(應劭)가 말하기를, "조선왕(朝鮮王) 만(滿)의 도읍이다. 물길이 험한 곳을 의지하고 있으므로, 험독(險瀆)이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신찬(臣瓚)이 말하기를, "왕험성(王險城)은 낙랑군(樂浪郡) 패수(浿水)의 동쪽에 있는데, 이곳이 험독(險瀆)이란 곳이다."라고 하였다.] ​

    [안사고(安師古)가 말하기를, "신찬(臣瓚)의 중장이 옳다. 패(浿)의 음(音)은 보(普)와 대(大)의 반절(反切)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왕험성이 위만조선의 도읍이라고 하였고, 요동에 있다고 하였으니, 한사군은 한반도가 아닌, 요동으로 보일수 있는데요.
    물론, 재야쪽 글을 보니,, 저 글의 패수가 되는 요수는 요하강이 아니고, 난하 이므로, 고조선이 패수의 동쪽 있다고 하였으니, 고조선은 본래 요서에 있었고, 따라서 요서에 한사군이 있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요수가 요하가 되었든, 난하가 되었든,,, 요동에 위만 조선의 도읍 왕험성이 있다고 하였으니, 어찌 보면 한사군이 요서까지는 아니더라도, 요동으로 보일 수 있는데요...
    한서지리지의 요동군 험독현 내용은 어떻게 보아야 하나요?
    상당히 궁굼한데, 물어 볼 만한 사람은 없고, 이렇게 염치 불구하고 글을 남깁니다...

  • 초록불 2016/10/12 07:56 #

    이에 대해서는 제가 뭐라 하는 것보다 이 글을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http://lyuen.egloos.com/5569636
  • 도사세손 2016/10/12 01:44 #

    이 글을 보면서 느낌 점이,, 재야학계는 강단학계에게 그 동안 연구 토론을 하자고 수차례 건의했으나, 강단사학은 식민사학이라 이론이 부족하고, 자신들의 거짓말이 들통날까봐.. 회피한다고 여러 책에 써놓았는데요. (물론 최근 신문기사에는 토론을 갖은 것이 보이더군요.)
    근데 이유를 알겠네요.. 재야쪽은 중국 사서 몇줄 가져와서,한사군의 위치는 한반도가 아니다고, 보여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럼, 강단학계는 중국쪽의 그 사서 중 무엇은 어떻게 하여 오류가 있는 것이다. 라고 일일히 설명하며 반박해야 하겠군요.
    즉 표현하기 쉽고 전달력이 강한 짧은 말과 표현하기 어렵고 지루하게 들리는 긴말의 싸움이 됩니다.
    이런 토론은 진실까지 파악하여 설명해야 하는 사람이 훨씬 불리합니다. 실력이 없거나, 거짓이라서 불리한게 아니고, 상대방이 짧은 시간내에 요점만 간추려서 팍팍 던지기 하면, 진짜 힘듭니다.
  • 초록불 2016/10/12 07:58 #

    그렇습니다. 이렇게 길고 치밀하게 논증을 했는데도 상대가 "그건 중요하지 않고요", "지엽말단적인 문제로 떠든다"라고 퉁 쳐버리면 돌아버립니다.
  • 도사세손 2016/10/15 00:25 #

    링크 답변 감사 합니다.
    읽어보고 여러 날 생각했습니다. 잠을 자다 말고 이불 속에서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번 생각해 보니 이해되는군요
    생각해 보니, 한서지리지의 험독현은 당연히 요동편에 있으니 요동에 있는 험독현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이에 응소는 위만조선의 도읍이 험독이라고 주해 하였는데, (물론 위만조선의 도읍도 험독이라고 불렀을 수 있고, 응소의 주해가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찬과 안사고가 볼 때 응소의 주해는 잘 못 이었습니다.
    그래서 훗날 신찬은
    [왕검성 (응소가 말한 위만조선의 도읍)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이다.]<= 신찬은 왕검성이 요동에 있지 않은 것으로 본 것임-
    [여기가 (한서지리지에 써있는 요동의 험독현) 마땅히 험독이다.] 이렇게 주해한 것으로,
    즉, 신찬이 말한 此(여기)는 응소가 말한 왕검성을 가르킨 것이 아니고, 한서지리지 요동편에 있는 험독 그 자체를 가르킨 것이며,
    안사고는 (응소의 주해가 틀렸고) 신찬의 말이 맞다 이뜻이군요.
    퍼즐게임 맞추는 것 같습니다.
    확실히 하나 더 배워가게 됩니다... 감사 합니다...
    어쩐지 한문 해석해 놓고, 응소, 신찬, 안사고의 주해 대로 하면 왕검성=험독현= 요동이 됩니다. 물론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3명 모두 왕검성=험독현=요동으로 의미로 주해했다고 가정 할 때 신찬과 안사고의 주해가 깔끔하지 않고 좀 이상 합니다. 만약 3명 모두 왕검성=험독현=요동 의미로 주해했다면. 신찬은 그냥 <응소의 말이 맞다.> 하거나 <왕검성이 험독이 맞다.>'이렇게 쓰면 되고, 안사고는 신찬이 맞다고 할것이 아니라, 응소와 신찬 모두 맞다 이렇게 써야하는데... 신찬과 안사고는 왜 저렇게 써놓았는지 의심 되었는데요. 링크한 글을 여러 번 읽고 이불 속에서 자면서 까지 생각해 보니.. 저 뜻이구나.. 이해되네요..
    감사 합니다...
  • 초록불 2016/10/15 23:23 #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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