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주, 선죽교, 단심가 *..역........사..*



[연합뉴스] 정몽주 선죽교 사망설은 거짓…충절 인물로 신화화 [클릭]
김인호 광운대 교수는 한국역사연구회가 펴내는 학술지 '역사와현실' 최신호에 게재한 논문 '정몽주의 신화화와 역사소비'에서 포은은 후대에 충절의 상징으로 신화화했으며 그가 선죽교에서 죽었다는 이야기는 허구로 판단된다고 주장했다. (중략) 현대에 정몽주를 충(忠)의 표상으로 인식하는 두 가지 이야기인 선죽교 사망설과 '단심가'는 조선 후기에 제작된 창작의 산물일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기사에 따르면 김인호 교수의 주장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16세기 후반에 최립이 지은 시에 선죽교가 정몽주 사망 장소라고 처음 등장.
2. '착한 대나무 다리'라는 선죽교 의미와 조선시대에 유행한 중국 고사 중 죽은 군주를 위해 다리 아래에 숨어 암살을 시도한 자객 예양(豫讓) 이야기가 결합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음.
3. 1439년 편찬된 <포은집>에 단심가가 없음.
4. 1617년 편찬된 <해동악부>에 처음 실림.
5. 1719년 편찬된 <포은집 속집>에 단심가 수록됨.

약간 근거가 빈약할 수는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름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했다.

<삼강행실도>에는 '몽주운명'이라는 챕터가 있다. 정몽주의 죽음을 다루는 내용이다. 그런데 삽화에 보면 다리가 나온다.



그런데 이 다리가 언해본에서는 사라져 버린다. 한문본은 세종 때인 1431년에 기획되었고 1434년 출간되었다. 언해본은 성종 때인 1481년에 나왔다.

두 판본의 그림을 비교해보면 세종 때 그림이 훨씬 정밀하고 아름답게 그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설에 따르면 세종 때 그림은 안견이 그렸다고 한다. 언해본의 그림은 한문본의 그림을 보고 그린 것으로 조금 간략하게 처리되었다. 즉 불필요한 세밀한 부분들이 제거된 그림들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 정몽주 삽화에서는 다리가 지워졌다. 선죽교가 정몽주의 죽음과 관련된 중요한 다리였다면 언해본에서 다리를 지웠을 리가 없다. 즉 선죽교에서 정몽주가 살해됐다는 인식이 있었다면 그림에서 다리를 지우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다. 조선초에 정몽주가 죽은 장소는 어떤 다리 인근이었을 것이나(그렇지 않다면 굳이 다리를 그려넣을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 다리에서 대나무가 자라났다는 전설 같은 것은 붙어있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삼강행실도 한문본은 당연히 양반들이 읽었을 것이며 그러면서 다리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보고 절개의 상징인 대나무를 뜻하는 선죽교를 떠올렸을 가능성도 농후하다고 할 수 있다.

<단심가>의 경우 <조선상고사>에서 백제의 한주라는 여인이 지은 시로 소개된 바 있다. 신채호는 정몽주가 차용한 것이 정몽주의 작품으로 잘못 알려진 것이라 주장했다. 이렇게 되면 단심가의 연원은 훨씬 위로 올라가게 된다. 그러나 출전이 되는 책인 <해상잡록>은 지금 전해지지 않는 책이라 작성 연대 등을 확인할 수도 없다. 역으로 <해동악부>에 처음 등장한 것으로 보아 <해상잡록> 자체가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책일 가능성이 있다 하겠다.


덧글

  • virustotal 2019/04/15 00:28 #

    근데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데 예양이야 그를 수십년 기다려준 지백이 조양자를 데리고 오면 환대를 이세계에서 해준다고 칩시다

    정몽주는 고려왕실도 등신취급했는데


    우왕 창왕 폐위하는 반대를 안했는데


    알아주는분이... 그게 문제인데 조선개국도 차라리 중달 마냥 정권을 유지하면...

    아 또 무인시대지..
  • 초록불 2019/04/15 10:03 #

    정몽주가 이성계와 친분이 있었으니 조선 시대 복권도 쉬웠을 거 같긴 합니다.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