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은 어떻게 만들어지나? *..역........사..*



환관을 만드는 수술에 대한 이야기는 영국인 George Carter Stent라는 사람이 쓴 [Chinese Eunuchs: Or, the Origin, Character, Dress, Duties, and Preparation of the Castrati of China]라는 제목의 책에 나오는 것이다. 책은 1879년에 나왔다.

저자에 대한 정보는 별로 찾을 수가 없었는데 1833년에 태어나서 1884년에 죽었고 중영사전 등을 편찬하기도 했다는 정도. 중국에서 자기가 보고 들은 환관에 대한 이야기를 위 책에 적었다.

환관 수술 부분 내용만 번역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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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나 남자아이를 내시로 만드는 곳은 북경 안 궁궐의 서화문(西華門) 바로 밖에 있다. 그것은 초라해 보이는 건물로 창자(廠子)라 불리는 작업장이다. 이 건물 안에는 정부로부터 보수를 받지는 못하지만 공인받은 사람들이 있다. - 그들은 내시가 되기를 원하거나 내시가 되기 위해 온 사람들을 위해 일한다.

도자장(刀子匠)이라 불리는 그들은 내시를 만드는 일이 생업이다. 그들은 보내졌거나 팔려온 아이들을 수술하고 회복할 때까지 보살피기 위해 은 6량을 받는다.

내시가 되기를 원하지만, 너무 가난해서 필요한 비용을 지불할 수 없는 성인 남성들은 환관이 되면 받을 월급에서 지불하기로 ‘도자장’들과 협상을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도자장’들은 그들(후보자들)이 신원보증인을 내세우지 않는 한 그들을 수술해주지 않았다.

‘도자장’들은 하나나 둘의 도제를 두었는데 거의 그들의 가족에게서 도제를 뽑아서 이 전문적인 일은 몇몇 가족의 세습적인 일이 되었다.

수술이 막 시작되려고 할 때, 후보나 피해자는 - 경우에 따라서는 - 앉아 있는 - 혹은, 더 뒤로 젖혀지는 자세로 항(炕=일종의 온돌)에 앉는다. 한 남자는 그의 허리를 감싸고 있고, 다른 두 사람은 그의 다리를 단단히 잡고 있어 그 부위가 움직이지 않도록 한다. 수술할 ‘도자장’은 칼을 손에 든 채 남자 앞에 서서 그에게 “후회하는가, 후회하지 않는가?”라고 묻는다. 소년의 경우는 질문하지 않는다. 소년의 보증인이 동의한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에 그 남자가 하소연하면, ‘도자장’은 수술을 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가 여전히 그의 의지를 표현한다면, 칼을 한 번 쓸어내리고 그는 내시가 된다.
수술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수행된다. 너무 많은 출혈을 방지하기 위해 배 아랫부분과 대퇴부 윗부분에 흰색 띠 또는 붕대를 단단히 묶는다. 그런 후 베어낼 부분을 뜨거운 후추 물로 세 번 씻어낸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내시가 될 사람은 몸을 기울이고 있다. 양물을 충분히 씻었을 때, 고환과 음경 전부를 낫 모양의 작은 구부러진 칼로 가능한 한 가깝게 잘라진다. 그런 후 납으로 만든 침 나무못을 요도에 삽입하고 상처 부위는 차가운 물에 적신 종이로 덮고 조심스럽게 싸맨다. 옷을 입힌 후 환자는 두세 시간 동안 ‘도자장' 두 명의 부축을 받으며 방을 두세 시간 돌아다닌 뒤 눕는 것이 허락된다.

환자는 3일 동안 아무것도 마실 수 없으며, 이 기간 동안 갈증뿐만 아니라 극심한 고통을 겪으며 소변 분출도 불가능해서 큰 고통을 겪게 된다.

사흘이 지나면 붕대를 풀고, 요도를 막은 꼭지를 뽑는다. 고통받은 사람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소변 줄기에서 안도감을 얻는다. 만약 이 일이 만족스럽게 일어난다면, 환자는 위험에서 벗어난 것으로 여겨지고 그것을 축하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소변이 나오지 않으면 그는 고통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통로가 부어올라 아무것도 그를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술을 하는 거친 방법에도 불구하고, 사망자가 발생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내 오랜 조사 동안 죽은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희생자는 서른 살의 남자였다. 이는 “4명 중 1명만 살아남는다”는 Chardin(누군지 확인 불가능)과 “3분의 2가 죽는다”는 이집트 무하마드 알리 파샤의 주치의 클로트 베이(1793~1868)의 말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다. 부크하르트Buckhardt(1818~1897)가 그 수술은 100건 중 약 2건에 대해서만 치명적이라고 말한 것이 정확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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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림 번역이므로 재미로 보시고 너무 신뢰하지는 마시압.

덧글

  • rumic71 2021/05/26 00:22 #

    저도 언젠간 잘라낼 생각이라 남의 일 같지 않네요...
  • 초록불 2021/05/26 09:55 #

    헉!
  • deokbusin 2021/05/26 04:52 #

    Chardin이라는 성을 쓰는 사람을 구글 검색으로 찾아보니 1779년에 사망한 화가 장 밥티스트 시메온 샤르댕이 먼저 검색에 오르고 추가로 검색하니 1713년에 사망한 장 밥티스트 샤르댕이 나타납니다.

    장 밥티스트 샤르댕(1643-1713. 영국에서는 존 샤르댕)은 프랑스 출신 위그노 보석상으로 페르시아를 중심으로 중근동에서 활동하면서 지금도 좋은 평판을 받는 페르시아 사정에 대한 책들을 남겼습니다. 인생 후반기에는 종교탄압을 피해 영국에 정착하여 찰스2세에게 기사작위도 받는 등 꽤 성공한 인생을 보냈군요.

    본문에 나오는 샤르댕은 저자의 시대와 같이 인용된 이들의 시대를 고려할 때 장 밥티스트 샤르댕이 가장 적합한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위키피디아는 정말 대단하군요. 신뢰도가 없네 뭐네 하지만 마이너에 가까운 사람이나 항목까지 꽤 자세하게 기술하니 쓰지 않으려고 해도 쓸 수 밖에 없군요.
  • 초록불 2021/05/26 09:56 #

    네, 저도 그 사람이 연상되긴 하던데, 제가 본 이 책의 장이 딱 이 부분 챕터 밖에 없어서 인용서적이 안 붙어있어서 확신을 못하겠더라고요.
  • 명탐정 호성 2021/05/26 06:54 #

    무섭군요
  • 초록불 2021/05/26 09:58 #

    가난 때문에 스스로 잘라버리는 - 이걸 自宮이라고 부릅니다 -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네요. 희망은 오직 환관이 되는 것 뿐인데 받아줄 수도 없어서 임시거처에 머물게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참 무서운 시절이었죠.
  • NRPU 2021/05/26 11:32 #

    그나마 조선은 막대기라도 남겨줘서 다행이군요ㅡㅡ
  • 초록불 2021/05/26 11:36 #

    되살이의 희망을...
  • 도연초 2021/05/26 13:45 #

    가난을 못이긴 부모가 자식에게 대물림하지 않으려고 궁에 가서 밥이라도 얻어먹고 살라고 고자로 만드는 거였지만 저 은 6량의 수술비용도 당시로는 적지 않은 돈이었으니;;(명, 청 기준으로 정7품관인 지현[군수]의 연봉이 은 45량이었고 정9품의 후보지현[군수대리, 보좌]의 말단 관료의 연봉은 30량이라서 평균 36량이었던 농가의 1년 수익보다 더 적었기 때문에 일정량의 뇌물은 묵인해 줄 정도였으니...)
  • 초록불 2021/05/26 13:47 #

    네, 은6량의 가치를 환산하면 굉장한 돈이었더군요. 저 외에도 자른 물건을 "寶"라고 부르고 그거 보관에 따른 이익도 있었더라고요.
  • 도연초 2021/05/26 14:06 #

    원보(元寶)면 V자 모양의(정확히는 종이배 모양) 은 하나였을테고 1량 자체도 동전으로 계산해보면 1000문(文) 정도이므로(이건 소액이었으니 시장에서 통용되었을 겁니다) 이걸 어림잡으면 6천문인데다 1량으로 좋은 백미 2섬(약 200Kg) 정도의 시세였다니 6천문의 동전 또는 쌀 12섬이라는 큰 돈인 셈입니다.

    문제는 금은의 가치가 쌀을 기준으로 하는 쌀본위제의 동아시아 경제체제 특성상 고대로 갈수록 금은이 귀해서 가치가 크지만 금은이 상대적으로 많아지는 명청대를 기준으로 한다면 대락 은 1량당 7-8만원 정도로 추산한다는군요.
  • 초록불 2021/05/26 17:49 #

    이 문제로 책을 낸 일본 사학자의 경우 1960년대 일본 초임 연봉의 절반 쯤으로 계산했더군요.
  • rumic71 2021/05/26 18:55 #

    참고로 현대의 고환적출 수술은 약 100만 전후입니다.
  • santalinus 2021/05/26 19:17 #

    사마천이 궁형에 처해졌을 때도 같은 방법이었을지 갑자기 궁금해졌습니다.ㅋ^^ 본문은 청대의 방법이니 한대에는 더 무지막지한 방법이었을 수도 있구요. 분명 거세하는 절차나 방식도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겠죠? 청대의 방식이 고대부터 변하지 않고 내려온 방식이었다면 꽤 많은 사람의 합작이 필요한 방식처럼 보입니다. 노애를 환관으로 위조시킬 때도 저렇게 많은 인원이 동원되었다면, 대체 그 입막음을 어케 했으려나요?+.+상상력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이런 미시사나 문화사가 참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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