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도의 역사

한반도를 토끼 모양으로 보면, 평안도 압록강 아래쪽에 토끼 앞니처럼 톡 튀어나온 부분이 있는데, 여기가 철산군이다. 그 아래 섬이 하나 있다. 이름은 가도.

광해군 14년(1622년)에 이곳을 차지한 명나라 장군이 있었다. 이름은 모문룡. 그는 후금이 요동 지방을 공략하던 1621년에 압록강을 넘어 도망쳐 들어온 사람이었다. 권세가 떠르르 해서 해외천자라 불릴 정도였다.

그는 220여 명의 병력으로 진강(단둥)을 공격하여 탈취하는 등 조선을 안전판으로 삼고 게릴라전을 펼쳤다. 그러니 후금에서도 가만 있을 리가 없었다. 모문룡을 잡기 위해 압록강을 넘어 남침을 감행했다. 이런 일을 가만 두고 볼 수 없었던 조선 조정은 모문룡에게 가도로 들어가 은신하라는 충고를 했다.

광해군은 모문룡을 가도에 "유폐"하고 신경을 꺼버렸는데... 이런 다음 해인 1623년에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임금을 몰아내고 새로 정권을 차지한 인조 입장에서는 명나라의 승인이 절실한 상태였고, 모문룡은 반정의 명분 중 하나인 친명반금의 상징이자 명나라와 연결되는 소중한 끈인 셈이었다. 때문에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이제 가도는 은신처가 아니라 모문룡의 영지가 되어버렸다.

아직도 임진왜란의 피해를 복구하지 못해 조선 재정은 적자 상태였는데, 이런 마당에 모문룡에게 엄청난 군비를 제공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출처:네이버웹툰 칼부림)

이괄은 평안도의 정예병들을 동원해서 반란을 일으켰고, 덕분에 난이 진압된 후 평안도의 군사력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이렇게 되자 모문룡은 자기 휘하의 병력과 전쟁통에 피난온 중국인(요민이라고 부른다)을 기반으로 오만 약탈을 자행한다. 모문룡이 거느린 병력은 2만8천 정도. 거기에 요민 십여 만 명이 그의 세력이었으니 조선 조정 입장에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었다. 문제는 이들의 주둔 비용을 모두 조선이 부담해야 했다는 것.

모문룡은 당시 명의 실세였던 환관 위충현에게 뇌물을 바쳐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해놓았다.

이래서 후금의 침략에 모문룡이 뭔가 하나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그나마 조선 조정의 혜안이라고 할 것인데, 그런 일이 없었다.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후금의 목표 중 하나는 모문룡 제거였다. 그런데 전쟁이 터지자 참전해줘야 할 모문룡과 그의 군대는 대체 어디 있었는가?

그는 잽싸게 도망쳤고 전쟁 기간 내내 후금군을 피해 숨어있었다. 이쯤 되면 아무리 호구인 조선 조정이라 해도 화가 좀 날만 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전쟁이 끝난 후 모문룡에게 "안 도와 줘서 섭섭하다"라고 말해버렸다!

모문룡은 반성했을까? 그럴리가.

모문룡은 조선이 후금과 짜고 자기를 제거하려고 후금군을 불러들인 거라고 화를 냈다. 그리고 명나라에 전쟁 결과를 보고하러 가는 장계도 고치게 했다. 후금의 공격에서 조선을 구원한 영웅이 자기라고 쓰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했을까? 그렇게 했다.

덕분에 모문룡은 명 조정으로부터도 큰 상을 받았다. (어질어질)

그런데 위충현의 뒷배였던 명 황제 천계제가 그해 가을에 죽었다. 권력을 잃은 위충현도 그해 겨울 자살했다. 환관들에게 밀려있던 명나라 동림당에게는 반격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1629년 여름, 새 요동경략 원숭환은 모문룡을 불러들여 그를 현장에서 처단해버렸다. 이렇게 환관들 세력 중 하나를 꺾은 셈이기도 했는데, 결국 다시 환관 세력의 반격으로 명장 원숭환도 처형된다. 이건 다른 이야기니까 생략.

가도는 이제 원숭환의 손에 들어갔고, 원숭환은 모문룡의 양자 부총병 모승록, 부총병 진계성, 중군 서보주, 유격 유흥조 넷을 가도의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이중 진계성이 감독관으로 최종적 책임자였다. 진계성은 딸을 모문룡의 첩으로 보낸 사람이었다. 얼마 후 원숭환은 진계성과 유흥조 두 사람을 지휘관으로 삼았다. 유흥조는 1629년 1월 3일 후금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그 뒤를 유흥조의 동생 유흥치가 물려받았다.

유흥조, 유흥치 형제는 1605년(선조38년)에 후금에 투항했다가 모문룡과 내통하고 1628년 9월 투항한 인물들이었다.

원숭환은 진심으로 후금을 공격하고자 했고, 이건 이것대로 조선 조정의 두통거리였다. 조선은 후금과 전면전을 펼칠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군사도 없고 군량도 없었다.

그런데 그 원숭환이 1629년 12월 체포되었다. 가도에도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 1630년 4월, 유흥치가 진계성을 살해하고 가도의 권좌에 올랐다. 유흥조가 전사하면서 유씨 일가가 다시 후금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후금에서 이들을 인질로 유흥치에게 선무공작이 들어갔던 때문이기도 했다.

명은 유흥치가 진계성을 살해한 것에 놀라 진압군을 파견했다. 그러자 유흥치는 반역의 뜻은 없다고 말하고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후금에도 충성을 맹세하는 등 이중행각을 이어갔다.

가도의 정변은 명백한 반역행위였으므로 조선 정부는 이때다 싶어 가도 정벌을 꾀했다. 그런데 정벌군이 조직되었을 때 유흥치가 가도를 떠나버렸다. 이때 유흥치는 명 조정에 해명하기 위해 등주(산동반도)로 갔다. 유흥치가 없으니 가도로 들어가도 소용이 없다고 갑론을박하다가 결국 군대를 철수시켰다. 그후 유흥치가 돌아왔는데 명 조정이 그를 처벌하지 않았으니 조선 조종도 그를 응징할 수가 없었다.

가도의 전횡도 여전히 계속되었다. 유흥치는 계속 명과 후금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고, 이제 명이나 조선의 지원도 예전 같지 않아서 가도의 생활이 피폐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 1631년 3월, 유흥치가 피살되었는데, 그 과정이 자못 미스테리하다. 승정원일기를 따르면 유흥치를 죽인 것은 유흥치가 거느리고 있던 투항 여진인들이었다. 이들은 유흥치를 데리고 후금으로 가려고 했는데 유흥치가 이를 따르지 않고 오히려 여진인들을 죽이려 해서 선수를 쳐서 죽인 것으로 말하고 있다.

한편 조선왕조실록에는 유흥치가 후금에 투항하려 하여 그 부하 장도와 심세괴가 그를 죽였다고 나온다. 아무튼 유흥치는 이중행적을 일삼다가 살해되고 말았고 가도의 권좌는 심세괴한테 넘어가게 되었다. 장도는 유흥치 피살 얼마 후에 수군 1300명을 거느리고 가도에서 철수했다.

심세괴는 본래 요동 상인 출신으로 추남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딸은 절세미녀로 모문룡에게 첩으로 바쳐 신임을 얻었다. 그도 모문룡과 마찬가지로 환관들에게 줄을 대고 있었다. 또한 모문룡과 마찬가지로 후금과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싶어하는 인물이었다.

가도가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흘러가자 모승록, 공유덕 등은 후금으로 도망쳤다. 모승록은 공유덕과 함께 등주를 공격했다가 패배하자 공유덕을 죽이고 명에 귀순하려다가 오히려 공유덕에게 살해되었다. 당시는 멸망이 다가오는 혼란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리고 1636년, 드디어 병자호란이 발발했다. 청군은 가도를 어떻게 여기고 있었을까? 다들 알다시피 (결과적으로 멍청한) 조선의 방어책은 대로를 텅 비워놓는 것이어서 청군은 쾌속 진격을 했다.

이때 가도의 명군이 나와서 청군의 후미를 공격했다면 이 전쟁의 양상은 달라졌을까? 하지만 가도의 심세괴는 움직이지 않았다.

청군은 가도의 배후지인 철산을 공격하게 부대 하나를 보냈다. 하지만 철산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다들 피난가버렸던 것이다.

남한산성에 포위된 인조를 구하기 위해 원군이 시급했고, 당연히 가도에도 원군 요청이 갔었다. 이 때문에 강화도의 수비병력조차 빼냈었지만 가도는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인조의 항복을 받은 청은 가도 공격을 명했다. 가도에서 도망쳐 청에 투항한 공유덕 등이 인솔한 청군과 평안병사 유림, 의주부윤 임경업 등이 이끈 조선군의 합동 공격이었다.

군민 5만이 밀집해있던 가도. 하지만 원래 용맹이라고는 없던 동네였다. 조청연합군 앞에서 버틸 재간이 없었다. 그나마 심세괴는 대장답게 비굴하지 않은 모습으로 죽었다.

그는 마푸타(馬夫大)가 무릎을 꿇으라고 한 명에도 따르지 않았고, 옷을 벗고 칼을 받으라고 하자 "죽은 자에게서 옷을 벗겨가는 것은 너희들 특기 아니냐. 내 피 묻은 옷은 네가 가지고 가라"라고 뻣뻣하게 대답했다. 격노한 마푸타가 한칼에 그를 죽였다. 그나마 이때문에 심세괴가 중국에서는 높이 평가받는다. 하지만 그는 일군의 장수로서는 낙제점일 수밖에 없다.

가도는 이렇게 멸망했다. 가도의 세력과 조선은 서로에게 책임을 미루고 서로에게 앞장 서기를 바랐다. 힘은 기울이지 않고 공은 세우고 싶었던 것이다.

조선은 가도에게 단호히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어야 했고, 가도는 본토와 협력하여 요동으로 진격했어야 했다. 하지만 앞장 서는 이 없는데 어찌 가능했겠는가.

덧글

  • 나인테일 2022/02/03 22:10 #

    청군 앞에 나라 두개의 운명이 풍전등화인데 그 최전선에 있었던 인간들 면면을 보면 뒷골이 땡기죠 ㅋㅋㅋㅋ 망하는 나라는 괜히 망하는게 아니구나 하는 소리 밖에 안 나오더군요.
  • 초록불 2022/02/03 22:35 #

    뭔가 잘못 되는 건 하나만 잘못 되어서 그러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여기서도 알게 됩니다.
  • 도연초 2022/02/04 16:09 #

    모문룡하고 광해군이 남긴 빅똥(...)이라고 할 수 있는 임시세금 모량미가 저거 때문에 생겼었다죠? 철산 가도 점거하고 왜란 때 재조지은을 핑계 삼아 자기 군사들 먹일 식량 바치라는 식으로 조선정부에 요청했다고 합니다. 하긴 나중에 원숭환의 죽음에 기여하는 명 중앙정부의 환관들에게 뿌려댄 뇌물이 어디서 나왔나 했더니...

    광해군 때 호남 전답 1결당 쌀 1두 5승(0.15석)의 세금이 별도로 추가되었다는데 모문룡이 돌아갔음에도 조선이 존재하는 한 계속 징수했다는 게 블랙 코미디였다죠?
  • 초록불 2022/02/04 18:04 #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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