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살의 명장 백기 *..역........사..*



진나라 소왕 밑에 백기라는 장군이 있었다. (백기를 휘두르면 항복인데...) 그가 함락시키고 점령한 땅은 부지기수인데 일일이 나열하지 않고 그의 학살만 나열해 본다.

소왕 14년에 한위 연합군과 싸워 24만 명을 참수했다.

소왕 34년에 한조위의 병사 13만 명을 참수했다. 조나라 병사 2만 명을 황하에 수장시켰다.

소왕 43년에 한나라 5개 성을 함락시킨 뒤 5만 명을 참수했다.

소왕 45년에 백기는 한나라 땅 야왕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그런데 이 때문에 한나라 상당군은 본국과 교통로가 단절되어 버렸다. 백기가 쳐들어올까봐 불안해진(이기면 싹 다 죽이는 백기) 상당군수는 조나라에 영지를 바치고 투항했다.

조나라는 상당군을 받을지 말지 고민했다. 이걸 받으면 진나라와 싸운다는 뜻을 분명히 하는 것인데, 과연 그래도 될지 걱정이었던 것이다. 이때 평원군이 받자고 주장해서 결국 받아들였다.

소왕 47년 진나라는 상당을 공격했다. 상당의 백성들은 조나라로 달아났고 조나라는 이들을 장평에 머물게 하였다. 진나라는 장평으로 진격했다. 진나라 장군은 왕흘이었다.

조나라는 명장 염파를 보내 진나라군과 맞섰다. 염파는 철저한 수비 전략으로 진나라의 공격을 막아냈다. 이런 염파의 전략을 조왕은 못마땅해했다. 여러차례 공격하라고 명했지만 염파는 말을 듣지 않았다.

조왕과 염파 사이가 나빠진 것을 눈치챈 진나라는 이간계를 펼쳤다. 염파는 물러나고 능력이 부족한 조괄이 장군이 되었다.
진나라는 왕흘을 대신하도록 비밀리에 백기를 파견했다.

백기는 미끼를 이용해 조괄을 끌어들인 뒤 포위했다. 조나라 군이 포위되자 소왕은 직접 군사를 징발해 장평으로 보냈다. 장평으로 들어가는 모든 길을 막아서 조나라 군사를 굶주리게 만들었다.

포위는 한달 반을 갔다. 식량이 모두 떨어진 조나라 군대는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조괄은 포위망을 뚫고자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백기를 능가할 수가 없었다. 결국 조괄마저 전사하자 조나라 군은 항복했다.

조나라 군은 모두 45만이었는데, 이미 5만 명은 죽었고 40만 명이 항복했다. 백기는 이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했다.

"일전에 한나라를 공격했을 때 상당의 사람들은 진나라에 항복하지 않고 조나라에 가서 붙었다. 조나라 병사들도 지금은 항복했지만 결국은 조나라에 붙을 것이 분명하다."

백기는 이들을 속여서 모두 구덩이에 파묻어버렸다. 구체적인 방법은 나오지 않는데 40만 명이나 되는 인원을 더 적은 병력인 진나라 군으로 죽여야 했으니 이들을 속여서 죽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참수하려고 해도 팔이 아파서 못 했을 듯.) 백기는 어린아이 240명만을 조나라로 돌려보냈다.

장평의 학살은 조나라에 큰 상처를 주었다. 오늘날까지도 백기에 대한 원한이 남아있다고 한다.

장평 학살은 몇 년 전에 발굴이 시작되어 무시무시한 해골들의 현장이 공개된 바 있습니다. (굳이 이미지는 안 넣겠음...)

이로써 백기가 죽인 인원만 89만 명. 이게 다 포로들이니 전쟁 중에 죽인 인원까지 하면 대체 얼마일지...

소왕 48년에 백기는 한나라를 공격했는데, 유세객이 진나라 정승과 백기 사이를 이간질하여 백기를 물러나게 만들었다. 이때부터 백기는 찬밥 신세가 되었다.

소왕 49년 진나라는 조나라 수도 한단을 공격했는데 소왕이 백기에게 지휘를 맡기고자 했으나 백기는 병을 핑계로 출전하지 않았다. (바로 이때 노중련이 구원군을 끌어내 방어에 성공하였다. 노중련 이야기는 다음에.)

소왕은 분개해서 백기를 사졸로 강등하고 도성을 떠나라고 했다. 백기가 도성을 떠나자 정승은 백기가 원망의 말을 남겼다고 모함을 했다. 백전백승의 잔인무도한 명장 백기가 원망을 남겼다? 결코 살려둘 수 없는 일이었다.

소왕은 백기에게 검을 내려 자결하라 명했다.

백기는 순순히 죽음을 맞이했다. 전장을 누빈 지 38년이었다. 백기는 죽으면서 다른 학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장평의 학살만은 후회했다.

"나는 진실로 죽어 마땅하다. 장평에서 항복한 조나라 군사 수십 만을 속여서 구덩이에 묻어버렸으니 내가 죽지 않는다면 누가 죽어야 하겠는가."

아마도 그는 포로를 참수하는 것과 같이 죽음을 선고하고 죽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여겼던 모양이다.

사마천은 백기가 전장에서 천하에 이름을 떨쳤으나 정승과의 틈에서 생긴 자신의 환란은 구제하지 못하였다고 평했다. 함께 열전에 실은 진나라 명장 왕전에 대해서는 일신의 보전만을 꾀하였고 그런 결과 후손이 항우에게 사로잡혔다고 평하였는데, 이런 것을 보면 사마천도 이런 학살에 대해서는 문제의식이 없었던 것 같다. 전근대의 한계라고나 할까.

그렇긴 해도 또 사마천이 이렇게 소상히 백기의 학살을 기록해주어 오늘날 "역사의 심판"을 해볼 수도 있다는 점도 기억해야겠다.

덧글

  • rumic71 2022/05/10 15:28 #

    그래도 전부 군사만 죽였네요. 창만 들었지 민간인과 큰 차이가 없던 시절이겠지만...
  • 초록불 2022/05/12 10:14 #

    아무래도 이 시절 전쟁은 군인들끼리 일어나긴 했죠.
  • 잠본이 2022/05/10 15:42 #

    만 단위로 죽이다니 혼자는 못했을테고 대체 부하들을 얼마나 굴린 겁니까(...)
  • 초록불 2022/05/12 10:14 #

    자기 묻힐 구덩이는 직접 파는 것이 보통...
  • 잠본이 2022/05/12 15:04 #

    사형집행도 셀프로 해야 하는 포로의 서러움!
  • 까마귀옹 2022/05/16 20:47 #

    상황이 비슷한 것으로 몽염이 있지요. 몽염에 대해선 태사공 선생은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기껏해야 지맥 끊은 것이나 언급하니 죽어도 싸지."라고 깠죠.
  • 초록불 2022/05/17 15:45 #

    태사공 나리의 시니컬함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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