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의 영원한 떡밥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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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차 추가 : 2009년 8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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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차 추가 및 수정 : 2010년 2월 14일
18차 수정 : 2010년 7월 25일



유사역사학(Pseudohistory)이란 역사학의 탈을 뒤집어썼으나 실은 비과학적, 비역사적, 비논리적 주장을 펼치는 모든 사이비 역사학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유사역사학이 대체 왜 문제인가?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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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7년 9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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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장으로 생긴 일 *..역........사..*

조선 후기에 묏자리를 잘 써야 출세를 한다는 헛된 믿음이 퍼지면서(지금도 많이들 믿는다는 게 함정) 새로운 문제가 일어났다.

어차피 그다지 크지도 않은 국토에 명당이라 할 만한 곳이 그렇게 넘쳐 흐르는 것도 아니었다는 것. 이미 쓸만한 자리는 다 써버린 상태. 그러니 이제 어쩌겠는가?
풍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남의 묘 쓴 자리를 훔치는 방법이 나왔다. 말이야 훔치는 것이지만 사실은 권세가가 빼앗는 것이 대부분. 이런 것을 '투장'이라고 부른다.

숙종 때 일이다.

성주 지방에 박수하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박수하의 선산이 명당이었다. 청안 고을 원님인 박경여가 이곳에 투장을 했다. 박수하가 항의하여 소송을 걸었다. 하지만 일개 백성이 원님을 상대로 소송을 해봐야 소용이 없었다.

박경여는 선산에 비석도 세우고 박수하를 거짓으로 고발하여 곤장 아래 죽게 사주했다.
조선의 잡史]곤장 100대 맷값이 고작 7냥… 벼랑끝 서민의 '극한 알바' : 뉴스 : 동아닷컴
박수하에게는 두 딸이 있었다. 아내가 죽었을 때 어린 나이에도 장례를 잘 치른 똑똑한 딸이었다. 박수하의 유품으로 피묻은 옷과 칼이 큰딸 문랑에게 전해졌고 문랑은 아버지의 처참한 죽음 소식에 까무라쳤다가 원수를 갚겠다고 맹세했다.

문랑은 집안의 하인들과 함께 선산에 올라 박경여 조부 묘를 열 손가락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파헤쳐 관을 꺼내 불태워버렸다.

가만있을 박경여가 아니었다. 분기탱천한 박경여는 백여 명이나 되는 부하들을 보내서 문랑을 때려죽였다. 막아섰던 남자 종 하나와 여자 종 둘도 다 죽여버렸다. 그래놓고는 관에는 문랑이 자기 집안 친척을 죽이고 자살했다고 고했다.

문랑의 동생 차랑은 원수를 갚겠다고 맹세하고 서울로 올라가 신문고를 치고 억울함을 호소했으며, 신하들이 궁에 드는 곳에서 기다렸다가 조신들을 만나 울며 호소했다.
태종 때 설치한 '신문고', 실제는 무용지물
열일곱 소녀의 노력이 소문이 나면서 각지에서 응원이 이어졌다. 글을 써서 응원하기도 하고 양식을 보내 굶주리지 않게 도와주었다.

상소가 이어지자 결국 사건을 재조사하라는 어명이 내리고 박경여도 투옥되었다. 하지만 박경여는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으로 세력이 있는 집안이어서 끝내 사건은 은폐되고 그도 처벌받지 않았다.

명당이라 하여 조상의 묘를 썼지만 아들과 손녀는 처참하게 죽었으며. 그 명당을 빼앗은 인간은 천하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옥살이도 했으니, 명당이 세상에 있다는 말처럼 허망한 것이 또 있겠는가.

한글 활자의 역사 *..역........사..*

한글날 특집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이래 한글 서체는 주로 궁녀들에 의해서 발전해온 것 같다. 오늘날 궁서체라고 부르는 서체는 바로 궁에서 사용된 글씨체라는 뜻으로 궁녀들이 써온 글씨다.

전통활자 시대 - 이 시대 한글 활자는 낱자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큰 목판(두 페이지를 한 번에 찍어낸다)에 새기는 것으로 시작한다.

낱자 활자도 만들어지는데, 나무로 만드는 목활자, 금속활자 외에도 도자기로 만든 도활자, 바가지로 만든 포활자가 있었다.

마지막 금속활자는 1858년에, 목활자는 1907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근대활자 시대 - 1880년 조선에서 추방된 프랑스 신부 리델은 일본에서 최지혁(1808~1878)이라는 공주 출신의 천주교 신도에게 글을 쓰게 해서 한글 납활자를 만들었다. 일본의 활자 회사 츠키지에서 만들어냈고 이 글자는 성경, 교과서 등에 널리 쓰였다.

새로운 활자가 등장하면서 활자의 한 시대가 바뀐다. 전기분해를 이용해서 만드는 전태법으로 만들어진 납활자였다. 이 전태법으로 만드는 활자 제조는 1950년대까지 이어졌다.

1928년경 동아일보는 새로운 활자를 만들어내고자 조선에서 목각을 제일 잘 하는 인물에게 의뢰를 했는데, 만들어진 글자가 청조체(淸朝體)로 한자 글자체인 명조체와 어울리지 않고, 활자가 너무 작아 보이는 등 신문에 사용하기 부적합했기에 다른 여러 글자를 다시 연구해보았으나(이때 궁체도 사용해봤다고) 결국 실패하고 1929년에 활자체를 공모했다.

이때 경성 사는 이원모(1875~?)가 당선이 되었고, 그의 글씨를 가지고 활자체를 만들기 위해 약 4년여의 시간을 보내며 다듬어서 동아일보 본문에 사용하는 활자체인 이원모 명조체를 만들어냈다.

이로써 한문 명조체와도 잘 어울리게 되었다. 이 글자체는 1933년 4월 1일부터 1950년 6.25까지 사용되었다. 물론 이 글자를 인쇄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일본 회사들의 힘이 필요했다.

이원모의 글자체는 북한 로동신문 글자체로도 이어졌다.

이무렵 조선 왕실 활자 조각공 출신인 박경서(?~1965)도 한글 서체를 만들었다. 그는 9포인트 크기에 龍자 4개가 들어가는 "말많은 절"자를 새길 만큼 실력이 좋았다고 한다. 그가 궁체 등을 바탕으로 해서 새로운 명조체를 만들었다.

1936년 만들어진 박경서 명조체는 이후에 국정교과서 등에도 사용되고 북한의 글자체도 이것을 바탕으로 한다. 박경서의 제자들이 월북을 많이 한 때문이라 한다. 평생 납활자를 만들 며 산 박경서는 납중독으로 사망했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글자는 우선 나무조각에 조각을 이용해서 사용하는 것이었으나 원도 제작의 시대가 오면서 한 시대를 마감하게 된다.

원도활자 시대 - 원도를 통해서 만들어진 활자는 필름으로 만들어 유리판에 부착하여 사용하는 것으로 그전에 나무에 조각을 해서 만드는 방식과는 완전히 달라진 것이었다. 크게 활자를 만들어 작게 축소해서 사용하게 되었다.

1948년 일본에서 장봉선(1917~)이 이원모체를 이용하여 원도를 만들었다. 최초로 만들어진 원도였으나 국내에서 활용하는데는 여러 제약이 있어서 불가능했다고 한다.

1954년에 이임풍(이흥용의 필명)과 박정래(최정순(1917~2016)의 가명)가 국정교과서체를 만들기 위해 박경서(?~1965)의 활자를 기본으로 원도를 만들었다. 1950년에 공모를 했는데, 당선자를 내기 전에 6.25가 터진 탓에 1954년에야 제작이 된 것이다.

1953년 국정교과서의 글자체 모집에서 박경서, 최주섭, 장봉선의 글자체가 호평을 받았다. 이 중 장봉선(1917~)은 장타이프라는 회사를 만들기도 하고 한글 풀어쓰기 운동을 했던 사람이다. 이 장타이프 회사에는 태시스템에서 글자를 만든 김화복(1953~)과 아래 이야기할 최정호도 다니고 있었다.

국정교과서 글씨체는 최정순(1917~2016)의 글씨로 1956년에 다시 제작되었다. 최정순은 뒤에 다시 언급한다.

1957년 동아출판사는 벤톤 활자 조각용 원도를 최정호(1916~1988)에게 의뢰해서 명조체를 만들었는데, 오늘날 우리가 쓰는 "바탕체(명조체 이름을 1991년에 문화부가 변경함)"의 근본이 되는 글자이다.

최정호는 1934년에 일본에 건너가 인쇄소에서 일하며, 요도바시 미술학원에서 디자인 공부를 했다.

최정호는 뒤에 삼화인쇄와 보진재를 위한 원도도 제작했는데, 이 원도가 사진식자기를 만든 일본 모리사와 사에서 전해졌고, 모리사와 사는 최정호에게 여러 한글 서체 제작을 의뢰했다. 이때 본문용 명조체를 비롯해 고딕체 등 십여 종의 한글 서체가 만들었다. 이 모리사와 식자기는 우리나라로 수입되어 최정호의 명조체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최정호의 글자는 출판사들이 선호했는데, 신문명조체는 최정순에 의해서 개량되었다. 1965년부터 한국일보, 경향신문, 중앙일보, 서울신문, 동아일보, 부산일보 등의 서체를 모두 개발했다. 50년간 서체 개발에 매진하여 어마어마한 서체 개발의 공을 이룩했다.
앞에 말한 바 있는 최정호가 삼화인쇄 글자체를 만들었던 것은 최정순이 준 원도에 기반한 것으로 그 글자체 원본은 백성학 체라고 한다. 최정순이 평화당이라는 인쇄소 용으로 글자를 만들면서 백성학이라는 사람이 1910년에 나온 글자체를 최정호에게도 주었다는 것. (최정순 증언) 백성학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

이 백성학의 글자체는 1954년에 일본사람이 했던 초전활판제조소(初田活版製造所)에서 구한 것이라고 한다.

디지털활자 시대 - 최정순은 1988년에 서울시스템에 들어갔다. 서울시스템은 신문조판을 컴퓨터로 하는 CTS를 만들어서 잘 나가고 있었고(물론 여기에 사용된 한글 서체는 모두 최정순 제작), 이때 조선왕조실록 디지털 작업을 하고 있었다.

1980년대에 컴퓨터가 들어오면서 컴퓨터에서 구현되는 한글 서체가 나타났는데, 이것은 도트로 이루어진 형태라 곡선은 계단 모양으로 표현되는 거친 활자였다. 이것을 비트맵 폰트라고 한다.

1988년에 신명소프트의 김민수 대표가 포스트스크립트를 이용한 컴퓨터 활자를 만들어냈다. 이렇게 되면서 매킨토시에서는 화면과 출력이 일치하는 위지윅 시스템을 선보이면서 편집계에 새로운 출발을 알리게 되었다.

최지혁, 박경서, 백학성, 이원모, 이임풍, 장봉선, 최정순, 최정호, 조정수, 이남흥, 김화복 등이 오늘날 한글 서체의 개발을 위해 지대한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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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조체에 대하여

명조체는 명나라 목판 활자체에 근본을 둔 글자인데, 활자로서의 첫 개발은 유럽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프랑스는 루이14세에 의해 1715년부터 한자 활자 개발에 들어갔다. 명조체를 선호한 것은 직선형 글자체가 개발이 편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프랑스는 무역을 위해서 한자 활자 개발에 나섰는데, 영국은 전도활동을 위해서 한자 활자 제작에 들어갔다. 19세기 초에 여러 책들을 만들어냈다.

이런 서양의 활자 제조 기술을 배운 일본은 19세기 후반에 명조체 글자를 만들어내서 사용한다. 이때까지 명조체라는 이름도 없었으나 1875년 이후 이런 글자체를 일본에서 명조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조선에 선교하기 위해서 성서의 한글판이 필요했던 선교사들은 최지혁의 도움을 받아 일본에서 한글 글자를 만들어내서 성경 인쇄 등에 사용했다.

따라서 "명조체"라는 명칭이 단순히 일본에서 붙인 이름이라고 해서 왜색이니 배제해야 한다는 것은 그다지 공감되는 주장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주장으로 인해서 오늘날 우리가 흔히 보는 "명조체"의 후예는 오늘날 "바탕체"라고 쓰고, 더불어 고딕체도 "돋움체"라고 쓰고 있다.

이여송의 숨겨진 이야기 *..역........사..*

매주 연재를 하는 탓에 이 책 저 책 뒤지다보면, 정말 감각이 남성향 판타지에 극치를 달하는 이야기들을 보게 된다. 시대 감각이 너무 떨어져서 연재물에 올리기는 뭐한데, 상상력만 놓고 보면 참으로 대단하다 소리가 나올 때도 있다.

임진왜란 때 이여송의 통역을 맡은 조선 역관이 있었다.

이때 김역관은 나이 스물로 천하제일 미남.

이여송과 더불어 남색을 하는데 그 즐거움이 남녀간의 즐거움을 뛰어넘었다.

이렇게 본격 BL물인가 싶었는데...

이여송은 김역관과 헤어질 수 없어서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를 통역으로 데리고 귀국했다. 그러다 요동에서 군량 수송 기간을 어긴 도통이 있어 참수하려 했다.

그 도통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다들 대단한 지위에 있었다. 세 아들이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고자 했다. 이들은 이여송이 김역관을 사랑함을 알고 김역관에게 구명을 부탁했다.

이미 이여송은 이 세 아들이 찾아온 것을 알고 그들의 용건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역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전쟁터네 나선 이래 사적인 간청으로 군법을 굽힌 적이 없다. 하지만 아무 힘도 없는 네게 높은 사람들이 간청을 했으니 너와 나의 관계가 탄로가 난 것이다."

그래서 목이라도 치는 걸까 싶었는데...

"내가 너를 데리고 와 한번도 생색 낸 일이 없는데, 이번에 너를 위해 이 부탁을 들어주겠다."

반전.

이래서 세 아들은 김역관에게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김역관은 금은보화도 거절하고 조선과 명의 정승 벼슬도 거절했다. 자꾸 세 아들이 조르자 드디어 김역관이 말했다.

"그저 천하제일의 미녀를 한 번 보았으면 합니다."

재물도 명예도 남김없이, 오직 색만 밝힌... 아니, 남색이라매?

이 말을 전해 들은 이여송의 반응은?

"너는 작은 나라의 인물로 배포가 엄청나구나. 그 소원은 황제라 해도 이루기 어려운 것이다."

이렇게 해서 북경에 입성한 뒤 세 아들은 김역관을 화려한 집으로 안내했다.

그곳에서 정말 정신이 혼미해질 미녀를 만났다. 세 아들이 그녀와 동침을 권유하자 김역관은 사양했다. 그러자 새 아들이 정색했다.

"저 여인은 운남왕의 공주로, 우리가 운남왕의 원수를 대신 갚아주고 운남왕에게 중매를 서서 데려온 것이오. 일자를 맞추기 위해 천리마 세 마리가 죽어나갔다오. 수만금이 든 일인데 운우지정을 나누지 않는다는게 말이 되오?"

하지만 김역관이 잠자리에 들려니 세상 사람이 아닌 미모에 정신이 오락가락 도저히 동침을 할 수가 없었다. (남색이라 그런 거 아닌가?)

그러자 세 아들이 김역관을 불러내 신비한 약을 먹였다. 그때서야 제정신이 돌아와 여인의 아름다움도 제대로 보였다. (비아그라였을까?)

이렇게 첫날 밤을 보낸 뒤, 세 아들은 김역관에게 공주를 어찌 할 것인지 물었다.

"앞날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한 번 보고 헤어진다는 것은 너무 안 된 일이오. 그렇다고 타국 사람이 운남국 공주를 데려가는 것도 어려운 일이오. 그렇다고 노모가 있는 당신이 이곳에 머물 수도 없소. 그러니 우리가 그녀를 보살피겠소. 그대는 매년 통역으로 이곳에 오시오. 견우와 직녀가 만나듯 다시 보는 것도 아름다운 일일 것이오."

이래서 김역관은 매년 통역으로 와서 공주를 만났고 둘 사이에 자식도 낳았고 그 아들은 벼슬길에 나가기도 했다.

자, 이 공주는 대체 무슨 죄가 있어서 한 나라의 공주로 태어나 졸지에 타국의 수도에서 천하제일의 미남이긴 하지만 신분이 낮은 자와 강제로 혼인하고 1년에 한 번 그 남자 오기만을 기다려야 했던 것일까. 물론 이야기 자체에 여자 입장은 전혀 언급이 없다.

결론... 김역관은 바이... (그걸 결론이라고!)

야담이니 역사 밸리 발행은 안 하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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