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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일본사
2008/05/14   박람회 구경거리가 된 조선인 [13]
2008/04/27   고려, 대마도를 정벌하다 2 [1]
2008/04/26   고려, 대마도를 정벌하다 1 [10]
2008/03/21   대동아공영론의 부활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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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람회 구경거리가 된 조선인
[팝뉴스] 오랑우탄과 함께 동물원에 전시되었던 피그미족 남성 [클릭]


기사를 살펴보니 이런 말이 나온다.

사람으로서 동물원에 전시된 채 관람객을 맞아야했던 비운의 인물에 대한 사연은 지난 4월 말 영국 가디언지를 통해 보도된 후 해외 인터네 사이트 등을 통해 소개되면서 네티즌들 사이에서 안타까움을 유발하고 있는 중이다.(중략) 벵가는 1906년 뉴욕 브롱크스 동물원의 원숭이 우리에 '전시'되게 되는데, 당시 동물원 관계자들이 인간이 영장류로부터 진화했다는 것을 관람객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이 같은 전시를 기획했다는 것이 언론의 설명.

내가 이 글을 쓰는 현재 저 기사 밑에는 댓글이 142개 트랙백이 2개 걸려있다. 다 읽어보진 않았지만 미국을 욕하고 저 피그미족을 동정하는 내용이 대부분인 것 같다.

그런데 저 시기와 같은 때 조선인도 저렇게 구경거리가 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는지?

1907년 일본에서는 신학문을 널리 장려하기 위한 박람회가 열리고 있었다. 박람회 이름은 동경권업박람회東京勸業博覽會. 명치(메이지)천황 제위 40주년을 기념하는 박람회이기도 했다. 박람회가 열린 우에노 공원에는 공중으로 올라가는 대관람차가 동경에서는 최초로 설치되었다. 우에노 공원에서 열린 이 박람회에는 도산 안창호도 구경을 가는 등 성황리에 개최되었다고 한다.

관람료는 15전. 대한매일신보 1907년 6월 6일자에 실린 박람회 묘사를 보면 이렇다.

관사는 굉장하여 구름 밖으로 날개를 뻗친듯 하고 국기는 찬란하여 바람결에 펄펄 날리며, 도시의 남자, 여자가 폭주하여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 박람회에의 전시관 중에는 한국통감지예韓國統監之隸라는 현판이 걸린 [조선관]도 있었다. 관사의 크기가 다른 전시관에 비해 현저히 작아 유학생들은 그것만 보고도 비감한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이 [조선관]에 전시된 물건은 사농공상의 각 사진, 쌀, 콩, 건어물, 약재, 곶감, 백목면, 비단, 저포 등 남녀의복과 밥상, 밥그릇, 화장대, 각종 제기, 삿갓, 농기구, 담뱃대 등과 범이 포효하는 듯 꾸며놓은 범가죽 2개였다.

그런데 대한매일신보에 글을 기고한 유학생이 박람회장에 들어갈 때, 일본인 몇이 "제1관 안에 조선 동물 2개가 있는데 대단히 우습더라"는 말을 들은 바 있었다. 호랑이 가죽이 우스울 리는 없으니, 이게 무슨 소리였을까 궁리하는 차에 수정관이라는 작은 관사가 하나 더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관람료는 대인 10전, 소인 5전.

돈을 내고 들어가니 어두컴컴한 방이라 지척이 분간되지 않는데 줄을 따라 가보니 빛이 희미하게 들어오는데 조선 남자 하나가 탕건에 갓을 쓰고 의자에 앉아있었다. 놀라서 성명을 물어보니 대구 사는 김가라 하고는 더 말을 하지 않았다. 다른 한쪽에는 장옷을 입고 눈만 내놓은 여인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 앞에는 난간이 쳐져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해놓았다.

일본인들이 낄낄대고 웃은 것은 바로 이 조선인들을 보고 웃은 것이다. 이 내용을 대한매일신보에 보낸 유학생은

우리나라 사람이 일본인에게 무슨 빚이 있어 같은 황인종으로 금전을 받아 관람케 하는가. 목이 메어 말이 막히고 두 눈에 눈물이 흐른다.

라고 쓰고 있다. 애초에 박람회장에 들어갈 때는 일본이 유신한지 수십년만에 서구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동양의 선구자가 되었으니 그 아니 위대하냐는 말을 하고 있었는데...

일본인이 구경거리 조선 사람 옆에 서서 각국 사람들에게 설명하기를, "이는 한국 소산이라 년年은 몇이오, 성명은 무엇이오, 용모는 어찌어찌 하다"라고 떠들어서 듣던 유학생들이 분개하여 수정관의 주인을 찾아가 항의하기에 이르렀다.

"귀국 사람이 말하기를 한국은 동문동종同文同種(한국과 일본은 같은 문자를 쓰는 같은 종족이라는 말로 후일 내선일체로 발전하는 개념)이라 하면서 이런 부도덕한 행위를 꺼리지 않으니 이는 우리 한국민족을 모멸함에 그치지 않고 인류가 되어서 인류를 능욕하는 것이오. 우리는 한인이 되어 한인의 모욕을 눈감을 수 없고 또한 세계 인류가 되어 같은 인류가 다른 인류에게 모욕을 가하는 것을 보고 참고 넘어갈 수 없어 불가불 그 죄를 고하고자 하오."

그러나 관사 주인이 애매하게 이야기하고 말자, 이들은 분함을 참지 못하고 구경거리가 된 여인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물었다. 하지만 그 여인은 좌우에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일본인들이 있는 탓에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다가 간신히 대답하기를,

"저는 본래 대구 사람으로 평소 친하게 지내던 일본인 여자가 동경에서 박람회가 열리는데 가서 시중만 잘 들면 한달 월급 몇십 원을 주겠다고 하여 일본어를 잘 하는 박서방이라는 남자와 동경에 오게 되었습니다. 자기들과 다니면 유람도 잘하고 이득도 적지 않을 것이라 하더미나 천만 뜻밖에 이런 모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동경박람회에는 아프리카[阿弗利加] 토인도 전시되지 않는데 일본인은 조선 사람을 구경거리로 만든 것이니, 그것을 지켜본 유학생들의 마음은 그야말로 천갈래 만갈래로 갈라졌을 것이다.

이 치욕스런 관람은 시찰차 동경에 와 있던 내부內部 참사관叅書官 민원식閔元植이라는 한말의 친일파 거두가 나서서 대구 여인의 비용이라는 수백원을 자비로 지불하여 귀국토록 함으로써, 한달 넘은 전시가 결국 끝났다. (대한매일신보 6월 21일자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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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불 | 2008/05/14 23:41 | *..역........사..* | 트랙백 | 덧글(13) | ▲ Top
고려, 대마도를 정벌하다 2
3. 고려, 왜구에 거덜나다

충숙왕 10년(1323)에 있은 왜구의 전라도 침공에 이어 충혜왕 후즉위년(1339)에도 그들의 변란을 걱정하는 상주가 있었다. 공민왕 즉위년(1351) 11월에 왜구는 남해현에 침입했다. 그후 왜구의 침입이 본격화 된다. 고려는 1350년부터 왜구의 침입이 본격화되었다고 보았는데, 그것은 우왕 3년(1377) 6월에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알 수 있다.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안길상(安吉祥)을 일본에 보내어 해적(海賊)을 금지할 것을 청하니 글에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당신 나라와 더불어 이웃이 되어 비록 큰 바다를 끼고 있으나 혹 때로 통호(通好)하였는데 경인년(庚寅年 1350)으로부터 해적(海賊)이 처음으로 일어나 우리 도민(島民)을 어지럽게 하여 각기 손상됨이 있으니 매우 안타깝도다. 이로 인하여 병오년(丙午年1366=공민왕 15년)에 만호(萬戶) 김룡(金龍) 등을 보내어 이 일을 보고하여 곧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의 금지하겠다는 약속을 얻어 조금 편안한 휴식을 얻었다. 근래에 갑인년(甲寅年 1374=우왕 즉위년)으로부터 그 도적(盜賊)이 또 방자하게 창궐하므로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나흥유(羅興儒)를 보내어 자문(咨文)을 가지고 온 당신 나라의 답신에 의하면 말하기를 이 도적(盜賊)은 우리 서해(西海)의 일로(一路)인 구주(九州)의 난신(亂臣)이 서도(西島)에 할거(割據)하여 무지하게도 구적(寇賊)이 됨에 원인이 있는 것이며 사실은 우리의 행한 것이 아니므로 곧 금지하겠다는 약속을 허락할 수 없다고 하니 이로 자세히 알게 되었거니와 백성을 다스리고 도적(盜賊)을 금지하는 것은 나라의 상전(常典)이니 앞에서 말한 해적(海賊)도 다만 금약(禁約)만을 좇지 아니할 수 없으니 두 나라의 우호(友好)와 바닷길의 안정이 귀국(貴國)의 처리 여하(如何)에 있다.”


확실히 왜구는 공민왕 대에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은 중앙 조정의 인식을 말하는 것이고, 그 이전에 왜구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공민왕 대에 이르러 왜구는 경상, 전라 연해를 벗어나 강화도, 강릉까지 출몰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침입은 고려의 조운선을 노리는 것도 많아서 고려는 왜구 때문에 조세를 제대로 거둘 수 없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공민왕 3년(1354) 4월 왜(倭)가 전라도(全羅道)의 조선(漕船) 40여 척을 노략하였다.
공민왕 6년(1357) 9월 녹봉(祿俸)을 지급하는데 때에 왜(倭)로 말미암아 조운(漕運)이 통하지 아니하므로 9품의 녹과(祿科)를 지급하지 아니하였다.


왜구의 침탈 때문에 조운창을 옮기기도 했다.

공민왕 7년(1358) 4월 정유(丁酉)에 왜(倭)가 한주(韓州 한산(韓山)) 및 진성창(鎭城倉)에 침구(侵寇)하니 전라도(全羅道) 진변사(鎭邊使) 고용현(高用賢)이 연해(沿海)의 창고를 내지(內地)에 옮기기를 청하거늘 이를 청종(聽從)하였다.

왜구는 식량 뿐만 아니라 배도 약탈했다.

공민왕 4년(1355) 4월 신사(辛巳)에 왜(倭)가 전라도(全羅道)의 조선(漕船) 200여 척을 약탈하였다.

왜구는 연해 뿐만 아니라 점차 내륙으로까지 침입하기 시작했다.

공민왕 7년(1358) 8월 기묘(己卯)에 왜(倭)가 화지량(花之梁 수원)을 불태웠다.

공민왕 13년(1364) 3월에는 왜구가 불과 한 달 동안 다섯 군데를 약탈하기까지 했다. 공민왕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공민왕 15년에 일본에 검교 중랑장(檢校中郞將) 김일(金逸)을 보내 왜구 근절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 결과 공민왕 17년(1368) 1월에 일본은 승려 범탕, 범류를 보내왔으며 7월에는 일본 사신과 대마도의 도주 종경(宗慶 조케이)의 사신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기도 했다. 공민왕도 강구사(講究使) 이하생(李夏生)을 보내 화친을 도모했다. 그해 11월에는 대마도에 쌀 1천석을 보내기도 했다. 또한 거제도에 왜인들이 거주할 수 있게 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왜구를 근절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공민왕 18년(1369) 11월에 왜구는 대대적으로 침공을 재개했다. 천안, 예산, 당진의 조운선을 약탈한 것이다. 이때부터 왜구의 침입은 다시 활발하게 일어났다. 또한 공민왕 21년(1372) 부터는 그동안 침공하지 않았던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며 약탈을 시작했다. 왜구의 입장에서는 이것은 불행한 선택이었는데, 이 약탈로 인해 왜구의 악몽이라 불릴 이성계가 전선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공민왕 21년(1372) 6월 고려 조정은 이성계를 화령(함흥)부윤으로 삼아 왜구를 막게 했다.

왜구는 공민왕 대에 115회, 우왕 대에 278회 침입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고려는 왜구에 의해 거덜나고 있었던 것이다. 왜구가 이렇게 설치고 일본 막부가 이들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한 것은 일본 내부 사정과도 관련이 있다. 1336년부터 1392년(이 해는 조선이 건국된 해이기도 하다)까지 일본은 남북조로 나뉘어 내전이 진행 중이었다. 천황도 둘로 나뉘어졌다. 이런 상황이어서 정상적으로 경제가 돌아가지 않았고, 물론 정치적으로도 통제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신흥국가 명도 왜구 때문에 골치가 아프긴 마찬가지였다. 명은 일본 실정막부室町幕府(무로막치 막부)의 3대 쇼군 족리의만足利義滿(아시카가 요시미츠)에게 조공무역을 허용하였고, 막부는 이를 위해 왜구 단속에 나섰다. 이로써 왜구 토벌에 대한 실마리가 잡혀나가기 시작했다.



4. 이성계의 활약

우왕 3년(1377) 6월 일본에 왜구 근절을 요청했으나 일본 측은 그들을 잡기 어렵다는 회신을 보냈다. 다급한 고려는 9월에 다시 일본에 사신을 보내 왜구 근절을 요청했다. 이때 사신으로 간 사람은 무려 정몽주鄭夢周! 고려가 이 문제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쯤 되자 일본도 성의를 보여야 했을 것이다.

우왕 4년(1378) 6월 왜구가 청주를 침입했을 때, 일본은 원군 69명을 보내오기까지 했다. 생색내기에 불과한 숫자지만 일본으로서는 자신들과 왜구가 다르다는 것을 증명했어야 했던 모양이다. 10월에 다시 일본에 사신을 보내 왜구 근절을 요청했으며 우왕 5년(1379) 5월에도 일본에서 군사 약간 명이 건너왔던 것 같다. 일본 막부는 아무튼 성의를 보여 잡혀간 사람들을 돌려보내는 등의 일을 했지만 왜구의 침입은 그치지 않았다.

한편 이성계는 우왕 3년(1377) 5월 지리산에서, 8월에는 해주에서 왜구를 쓰러뜨렸으며 우왕 4년(1378) 4월에는 김포에서, 우왕 6년(1380) 9월에는 황산에서, 우왕 11년(1385) 9월에는 함흥에서 왜구를 물리쳤다.

이중 1380년의 싸움이 바로 그 유명한 황산대첩이다. 1380년 8월 왜구는 5백여 척의 배를 가지고 충청도 금강 어귀에 상륙했다. 이때 최무선이 화포를 이용하여 적선을 모두 격침시켜버렸다. 돌아갈 배를 잃은 왜구는 내륙으로 들어가 약탈과 학살을 자행했는데, 그 피해가 극심했다. 이성계는 함양을 향해 집결하고 있던 왜구들과 황산에서 싸워 대승을 거두고 말 1,600 필을 노획했다. 조선 선조때 이 사실을 기려 황산대첩비를 세웠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부서졌다가 다시 세워지기도 했다.

이렇게 전국에서 활약을 하니 이성계의 위명이 천하에 떨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왕 14년(1388) 위화도 회군을 통해 이성계는 정권을 손에 넣게 된다.



5. 고려의 2차 대마도 정벌

그러나 국왕 즉위는 이성계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조민수와 이색이 힘을 합해 창왕을 즉위시켰으며, 창왕 원년(1389) 2월에 경상도 원수慶尙道元帥 박위朴葳가 대마도를 공격했다.

이미 대마도를 치자는 의견은 우왕 13년(1387)에 있었다. 정지鄭地가 상소를 올려 말했다. 대마도와 일기도에 일본의 반민叛民이 웅거하고 있어 그들이 늘 침략해 오니 이곳을 쳐야 근본적인 안정을 가져올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정지는 전함을 건조해 왜구를 막았던 인물이라 배를 몰고 대마도를 정벌할 생각을 쉽게 했던 것 같다.)

박위는 전선 1백척을 동원하여 대마도를 들이쳤다. 김종연金宗衍, 최칠석崔七夕, 박자안朴子安 등이 종군했다. 정지상鄭之祥의 아들 정종鄭從도 군사 백여 명을 거느리고 참전했는데, 그의 어머니가 정지상 사후 홀로 지내다가 왜적들에게 참살되었던 복수를 위해서 종군했던 것이다.

박위는 정박해 있던 왜선 3백여 척을 불태웠고, 해안가에 있던 집들도 모두 불살랐다. 잡혀가 있던 본국인 남녀 백여 명을 찾아내 구출했다. 창왕은 크게 기뻐하여 "국가의 수치를 씻고 신민의 원수를 갚았다"라고 말하며 포상했다. 그러나 박위가 포로를 잡지 못한 것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실제로 박위의 원정은 충렬왕 때의 원정과 같은 효과가 없었다. 원정 이후에도 왜구의 침입은 계속 되었다. 박위는 위화도 회군 때 이성계와 뜻을 같이 해 개국공신이 되었으나, 왕자의 난 때 정안대군 이방원에게 피살되고 말았다. 이제 공은 조선이 이어받게 되었다. 태조 5년 조선의 첫 대마도 정벌이 있었으며 세종 원년에 두번째 대마도 정벌이 있었다. 두번째가 유명한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이다.

그러나 박위의 정벌이 아무 효과도 없었다고는 볼 수 없다. 이런 일도 생겼기 때문이다.

창왕 1년(1389) 8월 : 처음에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보고(報告)하기를,
“유구국왕(琉球國王)이 우리 나라가 대마도(對馬島)를 토벌(討伐)한다는 말을 듣고 사신(使臣)을 보내어 순천부(順天府)에 이르렀다.”


또한 창왕이 기뻐했던 것처럼 늘상 적의 침탈에 당하고 있다가 공세로 전환한 것 역시, 자신감을 가지게 하는데 큰 몫을 했을 것이다. 박위가 대마도 정벌을 했을 때 이방원의 나이는 스물 셋. 그는 30년 후 대마도 정벌을 결정하게 될 것을 그때 알았을까?
by 초록불 | 2008/04/27 15:21 | *..역........사..* | 트랙백 | 핑백(2) | 덧글(1) | ▲ Top
고려, 대마도를 정벌하다 1
글이 삼수갑산으로 가더라도 일단 써놓고 보기로 마음먹고, 추후 수정보완키로 함.



1. 고려, 왜구의 침탈을 받다

대마도對馬島 정벌은 조선이 처음 한 것이 아니다. 고려말에 이미 원정이 있었다.
물론 왜구의 침입 때문에 일어난 원정이었다. 왜구에 대한 첫 기록은 고려사 고종10년(1223) 5월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갑자(甲子)에 왜(倭)가 금주(金州)에 침구(侵寇)하였다.

금주는 김해를 가리키는 말이다. 대마도와 가까운 이곳이 첫 침입지로 기록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마도는 땅이 척박해서 그곳의 물산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었고, 그 때문에 해적질에 나섰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이후 왜구의 침입에 대해서 고려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고종 13년(1226) 1월 : 왜(倭)가 경상도(慶尙道) 연해 주군(沿海州郡)에 침구(侵寇)하므로 거제 현령(巨濟縣令) 진용갑(陳龍甲)이 주수(舟帥=수군)로 사도(沙島)에서 싸워 2급(級)을 참살(斬殺)하니, 적(賊)이 밤에 도망하였다.

고종 14년(1227) 4월 : 갑오(甲午)에 현성사(賢聖寺)에 행차하였다. 왜(倭)가 금주(金州)를 침구(侵寇)하므로 방호 별감(防護別監) 노단(盧旦)이 군사를 발(發)하여 적선(賊船) 2척을 포착(捕捉)하고, 30여 급(級)을 베고 또 노획한 병장(兵仗)을 바쳤다.

고종 14년(1227) 5월 : 경술(庚戌)에 왜(倭)가 웅신현(熊神縣=김해 안의 현))에 침구(侵寇)하므로 별장(別將) 정금억(鄭金億) 등이 산간(山間)에 잠복(潛伏)하였다가 뛰어나와 7급(級)을 참살(斬殺)하니, 적(賊)이 도망하였다.

원종 4년(1263) 2월 : 계유(癸酉)에 왜(倭)가 금주(金州) 관내(管內)의 웅신현(熊神縣) 물도(勿島)에 침구(侵寇)하여 여러 주현(州縣)의 공선(貢船)을 약탈(掠奪)하였다.


이렇게 초기 왜구는 대체로 김해 지방에만 출몰했다. 1231년부터 몽골군과 싸우고 있던 고려(살리타이의 침공)는 왜구에 대해서 수동적인 방어 이상의 조치를 취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기록상 고종 대의 왜구 침입 기사 이후 고려가 몽골에 항복한 1259년까지 사이에는 왜구에 대한 내용이 없는데, 이것은 그들이 침입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그저 거기까지 고려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해 기록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기사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원종 즉위년(1259) 7월 : 경오(庚午)에 감문위 녹사(監門衛錄事) 한경윤(韓景胤)과 권지 직 사관(權知直史館) 홍저(洪貯)를 일본에 보내어 해적(海賊)을 금(禁)하도록 청하였다.

사신을 보내 해적을 금하게 해달라고 한 것은 그 전에 왜구의 침입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다만 기록에 없을 뿐이다. 고려는 고종14년의 왜구 침입 때도 일본 조정에 해결을 요청했고, 일본 측은 해적 토벌에 앞장선 전례가 있었다.

이들 왜구의 본거지가 대마도일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고려 조정의 요청으로 일본은 왜구 토벌에 나섰는데 그 결과에 나타나는 곳이 바로 대마도다.

원종 4년(1263) 8월 : 무신(戊申) 삭(朔)에 홍저(洪泞)·곽왕부(郭王府) 등이 일본으로부터 돌아와 아뢰기를,
“해적(海賊)을 궁추(窮推)하니 이것이 곧 대마도(對馬島)의 왜(倭)인지라. 미곡(米穀) 20석(石)과 마맥(馬麥) 30석(石)과 우피(牛皮) 70령(領)을 징수(徵收)하여 왔나이다.”
라고 하였다.

원종 10년(1269) 3월 : 신유(辛酉)에 흑적(黑的)과 신사전(申思佺) 등이 대마도(對馬島)에 이르러 왜인(倭人) 2명을 잡아 돌아왔다.


이렇게 김해 지방에만 출몰하던 왜구는 점차 영역을 넓혔다. (원종 1년(1260)에 왜를 대비하여 제주에 방호사를 두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 역시 고려가 몽골과 싸우던 중에는 왜구에 신경쓸 수 없었다는 방증이 될 것이다.)

원종 6년(1265) 7월 : 정미(丁未) 삭(朔)에 왜(倭)가 남도(南道)의 연해 주군(沿海州郡)에 침구하거늘 장군 안홍민(安洪敏) 등에게 명하여 삼별초 군(三別抄軍)을 거느리고 막게 하였다.

고려는 1270년부터 1273년까지 삼별초의 난을 진압한다. 그리고 다음해인 1274년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한다.



2. 고려의 1차 대마도 정벌

원종 15년(1274)에 고려는 원(1271년 몽골은 원으로 국명을 고쳤다)에 의해서 일본 정벌에 동원된다. 원은 일본 정벌을 위해 고려에게 대선 300척을 포함하여 총 900척의 전선을 만들게 한다.

기술자 3만 5백명을 동원해서 급히 배를 만들라고 재촉한 까닭에 그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고려는 원의 감독 홍다구洪茶丘를 달래서 절반은 농사를 짓게 돌려보내기도 했다. 이 배들은 전라남도 장흥군에서 고려 식으로 만들어졌는데, 1월 보름에 시작하여 5월 그믐에 모두 만들어냈다. 실로 엄청난 공사였을 것이다.

이 일로 노심초사한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원종은 6월에 자리에 눕더니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때 세자는 원에 있었기 때문에 고려는 국왕이 없는 상태에 놓이고 말았다. 그러나 원의 출정 명령은 시급해서 7월 김방경金方慶은 선발대로 출발해야 했다. 원은 일본정토 도원수日本征討都元帥 홀돈忽敦, 동정 부원수東征副元帥에 홍다구洪茶丘, 좌부원수左副元帥에 유복형劉復亨을 임명했다.

일본 원정군은 합포合浦(마산)에서 출발했다. 그 규모는 다음과 같았다.

몽한군蒙漢軍(몽골과 한인 연합군) 2만 5천.
고려군 8천.
초공(梢工 키잡이), 인해(뱃길잡이), 수수(水手 뱃사공) 6천7백.
총 3만9천7백 명에 전함 9백척.


고려군의 편제는 다음과 같았다.

삼익군(三翼軍)
도독사(都督使) - 김방경(金方慶) : 중군 통솔
              지병마사(知兵馬事) - 박지량(朴之亮) 김흔(金忻=金綬)
              부사(副使) - 임개(任愷)
좌군사(左軍事) - 김신(金侁)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지병마사(知兵馬事) - 위득유(韋得儒) 
              부사(副使) -  손세정(孫世貞)
우군사(右軍使) - 김문비(金文庇) 상장군(上將軍)
              지병마사(知兵馬事) - 나유(羅裕), 박보(朴保) 
              부사(副使) -  반부(潘阜)


여기에 본래 여진군도 포함될 예정이었으나 여진군이 기일에 대지 못한 관계로 바로 출발하였다. 이들의 일차 목표는 당연히 대마도였다. 고려사 김방경 열전에는 이 상황이 매우 간단하게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여진군(女眞軍)을 기다리니 여진군(女眞軍)이 기일(期日)에 늦을까 하여 이에 발선(發船)하여 대마도(對馬島)에 들어가서 쳐서 죽임이 심히 많았다.

그동안 왜구에게 쌓인 원한이 꽤나 깊었을 것이고 당연히 대마도 초토화로 보복했을 것이다. 의외로 대마도 정복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 전투ㅡ 즉 여몽원정군의 대마도 정벌을 이야기하지 않는데,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일본 측도 대마도 정벌로 여몽원정군의 위세를 깨달았을 것이다. 이들은 일기도一岐島에서 설욕전을 노렸다. 이 일기도 전투를 보면 대마도 전투에 대한 단서도 찾을 수 있으므로 이 전투를 조금 자세히 보자.

일본군은 언덕 위에 진을 치고 여몽원정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봉에 선 것은 고려군이다. 선봉에 나선 장수는 박지량朴之亮과 김방경의 사위인 조변趙抃이었다. 왜군은 일패도지한 후 항복을 청하다가 불시에 기습을 꾀했다. 그러나 홍다구가 박지량과 조변과 더불어 왜군을 몰아쳐 천여 명을 격살했다.

여몽원정군은 일기도를 휩쓴 뒤에 일본에 도착했다. 구주(九州 큐슈) 박다만(博多灣 하카다만) 삼랑포三郞浦에 상륙했다. 당시 일본군은 대포도 본 적이 없어 포성이 울리자 깜짝 놀랐다고 한다. 여몽원정군은 상대가 되지 않는 일본군을 여지없이 격파했다. 그러나 일본군도 손을 놓고 있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김방경의 중군을 노리고 좌우 협공을 가했다. 김방경의 중군을 노렸다는 이야기는 이 전투에도 선봉을 고려군이 맡았다는 증거라 하겠다.

일본군의 돌격이 살벌했지만 김방경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김방경은 효시(소리가 나는 화살로 군사 지휘용으로 사용함)를 쏘아 올려 장수들을 부르는 한편 크게 고함을 내지르니, 왜병은 놀라 달아나고 말았다. 박지량, 김흔, 조변, 이당공李唐公, 김천록金天祿, 신혁新奕 등이 왜군을 파죽지세로 수수깡 넘어뜨리듯이 쓸어버리니 몽골 도원수 홀돈도 "몽골인이 싸움에 익숙하다 하지만 고려군에 비할 바가 아니로다."라고 감탄하고 말았다. 해가 진 후에야 전투가 끝났다.

김방경은 승세를 몰아 계속 싸우기를 원했지만 홀돈은 좌부원수 유복형이 유시에 맞아 다친 것을 핑계로 무리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말하며 배로 돌아갔다. 그날 밤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통에 전함이 암벽에 부딪쳐 상당수가 파손되었다. 고려군 좌군사 김신도 배에서 떨어져 사망하는 사고를 당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더 이상 싸울 수가 없었다.

11월 여몽원정군은 합포로 귀환했다. 3만9천700 명 중 1만3천5백여 명이 수중고혼이 되었다. 일본에서는 이 전투를 문영지역(文永之役 분에이노에키)이라고 부른다.

여몽원정군은 충렬왕 7년(1281)에 다시 한 번 출동한다. 김방경은 3월에 합포에 도착하였고, 4월에는 충렬왕이 직접 합포로 행차하였다. 5월 1일에 다시 원정군이 떠났다. 이달 26일에 일기도를 향하고 있다는 보고가 조정에 들어왔다. 이것은 대마도를 정벌하고 일기도를 향해 가고 있었다는 뜻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때 대마도는 재차 정복되었던 것이다.

본 주제와는 관계 없지만 잠깐 이때 여몽원정군이 어찌 되었나를 간략히 적어보자.

일본은 적들이 또 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이들은 선공을 가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원은 사신을 보내 항복을 재차 권했으나 일본은 사신을 참수해 결전의 의지를 보였다. 그리고 코케닌(御家人)이라 불리는 영주들을 동원해 방비에 나섰다. 이들은 배가 상륙하기 힘들게 방루防壘를 쌓았다.

여몽원정군은 5월 26일 일기도에 상륙했다. 일기도의 지휘관 소이자시(少貳資時 쇼니 쓰케토키)는 19세의 나이로 항전 끝에 사살되었다. 일본 측 기록을 따르면 적군은 부녀자를 강간하고 손에 구멍을 뚫어 밧줄로 묶어 끌고 다니는가 하면,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는 만행을 저질렀다.

문제는 일본에 도착한 날짜가 너무 일렀다는 점이었다. 6월 15일에 합류하기로 한 강남군(중국 강남에서 출발하여 오기로 한 10만군)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들은 이미 6월 6일에 박다만(博多灣 하카다만)에 도착해 버렸다. 첫 전투가 벌어져 김방경의 고려군은 3백여 급의 수급을 얻었으나, 홍다구는 대패하고 말았다. 일본측 기록에는 천여 명을 죽인 것으로 나오며, 고려 측 기록을 보아도 진중에 역병이 돌아 3천여 명이 죽었다고 나온다. (전쟁에서 진중 역병이란 전사자의 다른 표현일 가능성이 높다.)

강남군은 예정보다 보름 늦은 7월 초에야 일본에 도착했다. 강남군과 합류한 여몽원정군은 상륙작전을 펼치기로 했다. 그러나 상륙작전을 펼치기로 한 7월 30일 태풍이 불어닥쳤다. 수많은 배가 침몰했다. 고려배 일부만이 돌아올 수 있었다. 이 태풍으로 고려군도 7천여 명이 익사했다. 원과 강남군 역시 대부분 수장되고 말았다. 이것을 일본에서는 홍안지역(弘安之役 고안노에키)이라고 한다. 일본 땅에 상륙한 사람들은 대부분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일부는 노예가 되기도 했었다. 이런 기록이 남아있다.

충렬왕 8년(1282) 12월 : 병신(丙申)에 상장군(上將軍) 인후(印侯)를 원나라에 보냈다. 동정(東征) 때에 봉성(峯城 파주(坡州))땅의 백성들이 왜(倭)에 몰입(沒入)되었다가 도망하여 원나라의 명주(明州)에 이르렀더니 황제가 이름을「갱생(更生)」이라 하사하고 백호(百戶 벼슬)를 주어 돌려보냈다.

이 뒤에도 일본 정벌은 꾸준히 추진되었으나 실행되지는 않았다. 왜구에 대한 기록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충렬왕 16년(1290) 1월 : 정미(丁未)에 대장군(大將軍) 원경(元卿)을 원나라에 보내 일본이 변방(邊方)을 침범한 것을 아뢰었다.

이 뒤 한동안 왜구에 대한 기록이 없다. 약간 애매한 기록이나 충렬왕 28년(1302)에 원이 요양성과 고려를 하나로 합한 뒤 수도를 요양으로 옮기고자 할 때, 고려는 일본을 방비하기 위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한다. 이때, 일본해적을 잡아서 바쳤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은 아직 왜구가 출몰하고 있었다는 증거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아무튼 충렬왕 시기에는 왜구는 거의 보이지 않는데 아무래도 이것은 대마도가 일본 원정으로 정벌되었던 여파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왜구에 대한 기록은 한세대 후인 충숙왕 때 다시 등장한다.

충숙왕 10년(1323) 7월 경자(庚子)에 내부 부령(內府副令) 송기(宋頎)를 전라도(全羅道)에 보내니 왜(倭)과 싸워 100여 급(級)을 참(斬)하였다.

고려, 대마도를 정벌하다 2 [클릭]
by 초록불 | 2008/04/26 15:23 | *..역........사..* | 트랙백 | 핑백(1) | 덧글(10) | ▲ Top
대동아공영론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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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시아 맹주론
우리나라에는 [환단고기]라는 위서를 신봉하는 일단의 극우국수주의에 매몰된 사람들을 비롯, [환단고기]를 믿지 않는다고 해도 인종주의와 혈통주의에 빠져 한민족의 위대함을 역설하는 일군의 "정신나간" 무리들이 있습니다.

증거 사료로 어떤 것을 대든 간에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이런 것입니다.

1. 고대 한국은 아시아를 지배하는 맹주였다.
2. 고대 한국의 피지배족이면서 지금까지 가장 위험한 적은 중국의 한족이다.
3. 한국은 고대로부터 아시아를 지배해왔으며 앞으로도 아시아를 영도해야 한다.

이런 가정 아래에서 중국(=한족)은 항상 적으로 등장합니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의 친일파를 미워하지만 현실 속에서는 일본 역시 동조동근, 같은 혈통이기 때문에 협력해야 하는(사실은 혈통의 종가인 한국에 복종해야 하는) 존재로 나타납니다. 현실 세계에 등장해 본 적이 없는 이 가상의 공동체를 이들은 "쥬신"이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

"쥬신"에는 다음과 같은 종족이 포함됩니다.

한민족, 일본 대화족, 몽골족, 만주족(말갈, 여진, 금, 청), 시베리아 제종족(고아시아 인종), 아메리카 인디언(인디언, 아즈텍,잉카), 흉노족(=훈족), 거란족, 돌궐족(=터키)

좀더 과격한 사람들은 어이없게도 다음의 종족들도 포함시킵니다.

묘족, 장족(=티베트), 라후족(=태국북부) 등

사실 핵심적인 부분은 굵게 표시된 부분입니다. 한국, 일본, 몽골, 만주족이죠. 이 종족 중에서 한국이 맹주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매우 간단합니다. 혈통상 우리가 가장 오래된 종가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증거는 [환단고기] 뿐이죠.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이미 19세기에 아시아에 등장했던 것이라는 걸 알고 계신가요? 바로 일본에서요.

2. 일본, 아시아의 맹주를 자처하다
일본의 아시아 맹주론에는 두가지 흐름이 있었습니다. 중국을 포함한 맹주론과 중국을 배제한 맹주론이 그것이다. 말하자면 재야의 아시아 맹주론은 후자를 계승한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맹주론은 좀더 오래된 것이고, 시대적으로 근접한 것은 후자의 것, 역시 혈통에 근거한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잠깐 이 둘의 차이를 짚어보죠.

아시아 맹주론이라고 쓰긴 했지만, 이것의 본 이름은 "아시아주의" 또는 "대아시아주의"입니다. 최초로 등장한 이야기는 동문동종론同文同種論이었습니다. 동일문명인 한자문화권에 들어있는 아시아 인종이 유럽 인종에게 대항해야 한다는 논리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1885년 준정등길樽井藤吉(다루이 도키치)의 [대동합방론]에서 주의주장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의외로 복택유길福澤諭吉(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1885)만 널리 알려져 있는데 동시대에 아시아의 맹주를 자처하는 주장도 드높았던 것입니다.

준정등길은 [대동합방론]에서 동문동조同文同祖 관계에 있는 일본과 조선은 합방하고 다른 민족인 중국과는 연대하여 서양 세력을 아시아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중국은 일본과 협력하여 베트남, 샴(태국), 미얀마와 연합하여 말레이 반도를 백인들 손에서 구하고 남양제도를 개척하는 길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죠. 준정등길은 겉으로는 일본과 한국의 대등한 합방을 주장했지만 실제로 한국에는 아무 권리도 주어지지 않은 강제병합이 이루어졌을 때 "숙원을 달성했다"고 기뻐했습니다.

준정등길의 "아시아주의"는 황인종이라는 사실에 기대고 있는 인종주의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사람들을 강력하게 이끄는 이론이 일본에 등장합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나라의 재야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혈통주의에 입각한 "아시아주의"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대쥬신론" 또는 "대동이大東夷"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전파되고 있죠.

이 혈통주의 속에서 중국은 같은 혈통이 아닙니다. 당시 일본이 같은 혈통으로 간주한 종족은 일본, 한국, 몽골, 만주, 시베리아 고아시아 인종들 뿐이었습니다. 동이족입니다! 감히 동이족의 땅을 침략하는 러시아를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었고, 결국 이들의 뜻대로 러일전쟁이 벌어지기도 하죠. 이 이야기는 다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인종주의를 따르는 아시아주의는 "지나낭인"들이 주장했고, 혈통주의를 따르는 아시아주의는 "조선낭인"(여기에서 만주낭인 등이 파생됩니다)들이 주장한 것입니다. "낭인"이라고 하면 칼이나 한자루 차고 거들먹거리는 사무라이를 생각하기 쉬운데, 이들 지나낭인이나 조선낭인은 지식인들이었고 여러가지 직종에 종사하고 있는 전문가들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이들의 주장을 한번 감상해보고 가겠습니다. 1916년에 나온 소사겸길小寺謙吉(고테라 겐키치)의 [대아세아주의론]의 한구절입니다.

민족통일사상은 세계의 대세이다. 왈 전미주의, 왈 대영제국주의, 왈 영어국민통일주의, 왈 범로주의, 왈 범독주의, 왈 범로마주의 모두 그 상징이다. 무릇 피는 물보다 진함에 연유한다. 당연히 대몽고주의가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대몽고주의는 바로 황색인종연랍론이다. 일본과 지나가 제휴해서 풍부한 부원을 개발하고 수많은 인민을 인도하면 지나의 개조 부흥은 기대할 수 있다. (중략) 대아세아주의를 가지고 편협한 인종적 감정에 기초한다고 생각하여 이것을 비웃는 자가 있다. 그런데 인종적 편견은 구미인의 가르치는 바이다. 백색인종에게 특히 그 깊음을 본다. 저 황화론의 도발적, 모멸적인 것이 그 실증이다.

백인종도 인종적 편견을 가르치고 있으니 우리도 해야 한다는 유치한 논리가 이 밑에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민족주의는 저항적 민족주의고,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주의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이 자도 자신의 인종주의는 서구의 파괴적, 공세적, 급진적인 것과는 달리 점진적, 평화적, 방어적인 것이라고 주장했죠. 똑같은 것을 놓고 다른 것이라 주장하는 이런 일들이 일본제국주의로까지 올라간다는 것을 아셨는지요?

그러나 이런 인종주의에 기초한 낭만적 이론보다 좀더 현실적인 이론이 등장하는데 그것이 이미 말한 바 있는 "동이"라는 혈통에 기인한 아시아주의입니다. 이 이론을 확립하고 전파한 단체가 "흑룡회"라는 단체입니다.

3. 흑룡회의 혈통주의에 입각한 아시아맹주론
흑룡회의 뿌리는 천우협이라는 단체까지 올라갑니다. 천우협은 무엇일까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천우협은 동학농민운동을 지원한 일본의 낭인단체입니다. 일반적으로 동학농민운동은 외세배격이라는 대의명분을 가진 것으로 알고 있고, 그 외세에 일본이 포함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할 텐데, 그 배격의 대상인 일본 단체와 동학이 협력했다니 무슨 말인가 싶을 겁니다. 물론 학자에 따라서는 천우협과 전봉준이 만난 적이 없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남을 떠나서 천우협이 동학농민군을 지원하고자 조선으로 들어온 것은 사실입니다. 물론 이들은 일본 정부에 의해서도 위험분자로 지목되어 체포되기도 하죠.

이들 중 일부는 후일 민비(=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1901년 결성된 흑룡회는 대일본제국의 영토를 흑룡강까지 도달케하자는 목적으로 단체 이름을 흑룡회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들 낭인들은 단순무뢰배가 아닙니다. 이론적 배경을 만들 학식을 가진 인간들이죠. 그럼 흑룡회의 사상적 토대를 간단하게 살펴봅시다.

이들이 기초하고 있던 사상은 "동이, 북적 문명론"과 "동일혈통론"이었습니다. 이 이론에 근거해서 일본, 조선, 만주, 시베리아를 하나의 권역으로 설정합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같은 황인종이라 해도 동이가 아닌 중국은 이 권역에서 제외됩니다. 본래 동이족은 중국 동북방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서역지방에서 이주해온 한족에 의해서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다퉈온 사이라고 말하죠. (재야사가들의 주장에 조금이라도 식견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이것이 바로 황제-치우의 탁록대전 이후 한족과 한민족이 허구헌날 싸웠다는 그들의 주장과 동일한 것이라는 점을 금방 알 수 있을 겁니다. 또한 이들은 중국 문명이 중동문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런 이론은 우리나라의 문정창 같은 재야사가에 의해서는 중국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그곳에 한민족을 집어넣어 놓았습니다. 물론 후대 일제의 재야사가들은 그 자리에 일본이라는 이름을 넣기도 했지요.) 이들은 일본이 서양의 신문명을 받아들여 동이, 북적 민족 중 가장 발전한만큼 일본을 중심으로 "고대 역사"에서 증명하는 바와 같이 하나로 뭉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 결과 당연하게도 조선과 일본의 합방이 이들의 과제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아시아, 특히 동이족의 영토를 쳐들어오는 러시아를 막아야한다고 생각했고, 시베리아 등지에 많은 낭인들을 보내 정찰을 하게 합니다. 이들의 선전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실제로 많은 조선인들도 일본의 대러 전쟁이 아시아 평화를 위해 짊어진 수고로움이라 생각했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에 편승해서 만들어진 친일단체가 이용구의 [일진회]입니다. 일진회는 흑룡회와 불가분의 관계였습니다. 이들은 한일간의 동등한 합방을 요청하는 척 했지만, 일본 정부는 한국 측의 권리는 인정하지 않는 강제병합을 하였고, 곧바로 한국인 최대의 정치단체인 일진회를 해산시켜버립니다. 친일이건 뭐건 어떤 한국인 정치단체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 이용구도 죽으면서 자기가 속았다고 한탄했을 정도입니다.

4. 흑룡회와 대동아공영론
흑룡회의 이론은 결국 동이족의 영토를 모두 차지하려는 일본제국주의에 사상적 토대로 활용되었습니다. 흑룡회를 만들고 흑룡회의 이론을 창안한 내전양평內田良平(우치다 료헤)의 이론을 잠깐 볼까요.

그는 아세아라는 이름 자체가 일본의 옛 이름인 위원葦原에서 유래된 것으로 전 아시아가 일본의 옛 영토였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환단고기에 입각해 전 아시아가 환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재야사가의 주장과 동일한 것이죠.

그의 주장 중에는 이런 황당한 주장도 있습니다.

천지 이변 때문에 일본 본토와 대륙의 교통이 완전히 두절되기에 이르고, 그 결과 아세아 대륙의 중앙에 위치하여 인류 진보의 선구가 되는 만주와 몽고에서 중앙아세아에 걸친 지대는 교통이 불편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후도 한랭하게 되어 이에 세계적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다고 보인다. 그래서 우리 야마토민족은 이때 그 본거지인 만몽의 주요지역을 파괴당하고 남하하여 황하를 중심으로 해서 발전하기에 이르렀지만, 본토(일본)와의 연락교통이 완전히 두절되었기 때문에 홀로 대륙에 남아 일본의 통치를 떠나 독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에는 결국 같은 야마토민족이면서도 역사와 풍속을 달리하고 언어도 통하지 않는 관계가 되었다.

중국 대륙에 자기들 종족의 일부가 남아있었다는 주장은 우리나라 재야사가들도 흔히 하는 주장이죠. 이들 대륙에 남은 동이족은 한족과 경쟁 대립하면서 자신들의 옛 땅인 만주, 몽고로 쫓겨나게 됩니다. 따라서 일본과 만주, 몽고, 조선은 다 같은 혈통이 되는 것이죠. 바로 내선일체론입니다. 그리고 이런 점을 우리나라 재야사가들도 전혀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조선이 종가고 일본은 지류의 가문이라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그리고 이 이론은 1920년대말 대공황을 만나면서 파시즘으로 발전합니다. 이 이론을 근거로 대동이족의 영토를 찾겠다는 신념으로 일어난 전쟁이 만주사변이죠. 또한 천황의 신격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팔굉일우의 대일본제국, 대아시아주의, 대동아공영론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천황을 유교적 가부장체제의 정점에 놓고 혈연공동체로서 국가를 건설해나가고자 한 것이죠. 오늘날 대표적인 재야사가 임승국이 [한단고기]에서 오직 "피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런 사상의 영향을 깊이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5. 재야사가와 대동아공영론
재야사가들은 "동이"라고 되어 있는 종족은 다 같은 민족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한몽연합국가론이라든가, 대쥬신벨트 건설이라든가, 심지어는 묘족이나 티베트도 우리민족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죠. 어떤 정신나간 재야사가는 청이 우리민족의 정통이고 우리는 곁가지라는 자기 정체성마저 상실한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이론의 뿌리가 일본의 흑룡회에서 그리고 대동아공영론에 뿌리를 박고 있음을 이제 아시게 되었을 것입니다.

재야사가들이 이런 대동아공영론의 이론을 왜 떠들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들의 사상적 기초를 놓은 인물들이 일제강점기에 이들의 사상에 깊이 영향을 받은 인물들이기 때문입니다.

흑룡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던 기독교 지도자 중 하나였던 최동은 그들의 이론에서 일본을 한국으로 바꾼 [조선상고민족사]를 내놓아 재야사가의 이론적 기초를 만들었습니다. 이 이론은 일제강점기에 계속 들어온 것이기 때문에 당대 학식있는 인물들에게는 쉽게 이해되는 내용이었죠. 일제강점기에 군수를 비롯해 고급문관으로 근무했던 재야사가 문정창은 이 이론에 깊이 경도되어 여러가지 책을 내놓습니다. 이미 말한 바 있지만 중동지방의 문명에서 우리나라가 기원했다는 주장도 문정창이 내놓은 것입니다. 물론 그 이론은 이미 20세기초에 흑룡회에서 내놓았던 것을 살짝 바꿔놓은 것이죠. 또한 [환단고기]를 날조한 이유립은 친일단체인 조선유교회에 있으면서 당대 널리 퍼져있던 흑룡회의 이런 이론들에 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일본 극우사가인 녹도승鹿島昇(가지마 노보루)은 [환단고기]가 자신들 극우사관의 비조인 흑룡회의 적자라는 것을 알아보고 일본에 수입하여 소개했던 것이죠.

재야사가들이 일본의 극우사가 오향청언吾郷清彦 등의 이론을 좋아하는 것도 따라서 당연한 것입니다. 본래 뿌리가 같기 때문이죠. 일본 안에서는 이런 극우사관은 거의 소멸된 상태입니다. 이런 것이 안타까운 김운회 같은 재야사가는 일본이 "대쥬신"의 정체성을 망각했다고 개탄하기도 하죠. 정말 어이없는 일입니다.

이런 자신들의 정체성을 숨기는 좋은 방법은 다른 희생양을 찾는 것입니다. 그 덕분에 국내 역사학계는 친일파의 본산지라는 음해공격을 끊임없이 받았습니다. 저들이 걸핏하면 공격하는 이기백 교수로 말하자면 독립운동가 남강 이승훈이 종조부인 분으로 집안이 일제에 어떤 협력도 한 바 없는 독립운동가 집안인데도 친일파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저들은 명백하게 친일단체와 인연을 맺거나 일제강점기에 고위 문관으로 근무한 자신들의 뿌리에 대해서는 어떤 공격도 용납하지 않고 있죠.

혈통주의에 입각하여 다른 나라와 민족에게 침략 근성을 드러내는 재야사가의 이론에 아직도 혹하십니까? 어서 그 마수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이들의 이론은 바로 혈통에 입각하여 600만의 유태인을 가스실에서 처형한 나찌의 혈통주의와 다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재야사가의 이론에 대해서 좀더 알고싶다면 국수주의 사학의 영원한 떡밥 [클릭]을 참조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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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불 | 2008/03/21 11:37 | *..역........사..* | 트랙백 | 덧글(52) | ▲ Top